[뷔민] Look for a star
김태형은 죽었다. 내 친구이자 사랑이었고 연인이었던 김태형은 2년 전 차가운 이별 통보를 남긴 후 파리로 떠났었다. 그로부터 딱 1년째 되는 날 친구로부터 태형의 사망 소식을 들었다. 손 쓸 수 없을 정도의 희귀한 불치병에 걸렸었다고 했다. 병명이 해괴해서 채 외우지도 못했다. 그래서 헤어지자고 한 거야? 잊으려 했던 얼굴을 리와인드 해서 물었지만 돌아오는 답은 없었다. 진실은 그가 가지고 떠났고 알고 싶지도 않았다. 하지만 조금 취한 밤이면 떠오르는 기억은 밤새 괴롭히고 가끔 꿈속 까지 흘러들어와 나를 온통 휘젓고 사라졌다. 눈을 뜨면 살갗에 와 닿는 꿈과 현실의 괴리 속에서 나는 서서히 태형의 죽음을 인지하고 받아들이고 있었다. 다 잊었다고 장담할 순 없지만 적어도 그의 죽음은 충분히 인지하고 있다. 그건 분명하다. 그런데 왜...
“...김태형?”
분명 내 눈앞에 보이는 얼굴은 그가 맞았다. 김태형. 김태형이 내 앞에 나타났다. 믿지 못할 상황에 나는 눈물도 비명도 나오지 않았다. 그럴 리가 없는데... 니가 여기 있을 리가 없다. 오랜 시간을 함께한 만큼 내 지인들은 모두 태형과 연관된 사람들이었다. 그들이 내게 던지는 동정, 죽은 연인을 잊지 못하는 가련한 멜로영화 속 주인공 취급이 지겨워 나는 도망치듯 유학길에 올랐다. 김태형과 전혀 상관이 없는 곳. 한국도 파리도 아닌 바로 이곳. 샌프란시스코로.
“안녕?”
“......”
아, 내가 꿈을 꾸고 있구나. 하고 생각했다. 그게 내가 내릴 수 있는 가장 현실적인 결론이었다. 술은 끊은 지 오래니까 취기가 아니라면 이건 꿈이다. 대낮부터 귀신이 나올 리는 없고, 설사 김태형이 귀신이 됐다고 해도 파리도 한국도 아닌 샌프란시스코에 나타날 리가 없잖아. 검지를 천천히 움직여보았다. 가위눌림일지도 몰라. 내가 꿈에서 깨려 갖은 노력을 할 때 그가 웃으며 다시 내게 인사를 했다. 안녕?
“내 이름은 뷔야.”
“...말도 안돼.”
살아 있을 리가 없잖아. 그런데 자꾸 가까워지는 얼굴은 그런 생각을 부정하게 만들었다. 이게 뭔데...이거 대체 뭔데. 꿈이라고 하기엔 너무하잖아. 사라져 버린 줄로만 알았던 감정들이 점점 수면 위로 올라왔다. 잊어버렸다고 생각했던 기억들이 뚜렷해지기 시작했다. 바람이 불고 머리칼이 넘어가면 멈췄던 시간이 흐르는 것처럼 느껴진다.
“나 좀 도와줘.”
내가 하고 싶은 말이 그의 입에서 나왔다. 손끝이 떨리고 다리가 후들거려서 그대로 바닥에 주저앉자 그도 나를 따라 맨바닥에 털썩 앉았다. 그렇게 한참을 넋을 놓고 있다가 정신을 차렸을 땐 이미 그를 집으로 데려와 버린 후였다. 내 집 방바닥에 대자로 누워있는 그를 보며 나는 이것이 꿈이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다.
**
그는 행성을 잃어버렸다고 했다.
“지민아!”
구슬 이라고 했던 것 같기도 하다.
“지민아 그거 맛있어?”
김태...아니, 뷔가 내 손에 들린 맥주병을 가리키며 묻는다. 나는 답 없이 맥주를 들이켠 후 캬아! 소리를 내며 테이블에 탕! 소리 나게 병을 내려놨다. 그러자 슬금슬금 다가온 그가 빈 병을 집어 든다. 입을 쫙 벌리고 그 위로 병을 탈탈 털자 남아 있던 맥주 몇 방울이 흘러 나왔다.
“으웨엑... 완전 써!”
그럴 줄 알았다. 김태형은 쓴 걸 싫어하니까. 물론 내가 김태형과 뷔를 동일하게 여기는 건 아니지만...그냥 왠지 그럴 것 같았다. 함께 지내는 동안 내내 비슷한 모습을 너무 많이 봤으니까. 벌써 그와 함께한지 3개월의 시간이 흘렀다. 작은 행성인지 구슬인지를 찾으면 돌아갈 거라던 뷔는 여전히 내 방에서 까치집을 한 채 바닥을 뒹굴고 있었다. 이럴 줄 알았으면 도와주지말걸. 대체 뭘 어떻게 도와달라는 지도 모르겠고 여전히 저 얼굴을 보면 김태형이 떠올라서 속이 어지럽다.
아, 더워. 고작 맥주 몇 병에 취기가 올라와 양 볼이 뜨거워졌다. 거실 왼편에 있는 창문을 드르륵 여는데 마음속을 맴돌던 말이 훅 튀어 나갔다.
“왜 하필 나야?”
3개월 동안 묵혔다 꺼낸 내 질문에 뷔는 단번에 답을 내놓는다.
“니가 마음에 들어서.”
봐, 또 이런다. 흐려지는 초점을 그에게 맞췄다. 역시 김태형과 똑같은 건 얼굴뿐만이 아니다.
“제일 마음에 드는 사람을 골랐어.”
저렇게 사람 속 시끄럽게 만드는 소리를 천진한 얼굴로 참 아무렇지도 않게 한다. 가슴부터 시작된 울렁거림이 손바닥을 지나 손마디를 타고 흘러 손톱 끝이 저릿해진다. 마음이 녹아서 없어져 버릴 것 같다. 김태형은 이 증상을 ‘마음이 운다.’고 표현했다. 참 그 다운 발상이다. 내 눈은 울지 않은 지 꽤 됐다. 버석한 눈가를 쓸어내리는데 여전히 녹을 것 같은 울렁임이 지속된다. 그만 자야겠다.
그리고 그날 밤 꿈에 김태형이 나왔다.
반짝이는 금빛 머리인 뷔와는 다르게 꿈속의 태형은 신입생 시절의 갈색 머리였다. 가지런히 내려온 앞머리가 길어서 옆으로 넘겨주자 나를 바라보는 눈이 시선을 맞췄다.
“지민아”
“응?"
“가자, 집에.”
내손 보다 더 큰 손을 내민다. 우리는 손을 잡고 어둑어둑한 밤길을 걸었다. 태형이가 콧노래를 부르는데 그때마다 머리 위로 별들이 하나둘씩 나타났다. 자각몽이 아닌데도 나는 이 그립던 시간을 더 만끽하고 싶어졌다. 손을 더 힘줘 꼭 잡자 나를 돌아보는 얼굴이 따듯했다. 발걸음은 허공 위를 떠돌 듯 가벼워서 마치 스케이트를 타는 것 같았다. 미끄러지듯 도착한 우리의 집 앞에서 나는 문을 열기 위해 잠시 태형의 손을 놓았다.
그리고 활짝 열린 문 안으로 텅 빈 곳이 보였다. 어둡고 공허한 공간이 두려워 뒷걸음질 쳤다. 뒤를 돌아봤지만 태형이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김태형! 소리쳐 부르고 싶지만, 뭐에 막힌 듯 목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태형아! 거의 울부짖듯 소리치는데도 여전히 아무런 소리가 나지 않는다. 웅웅 귓가가 울리고 가슴부터 시작된 울렁거림이 손바닥을 지나 손마디를 타고 흘러 손톱 끝이 저릿해진다. 마음이 우는 거야.
“지민아, 박지민!”
“...허윽...태형아!!!”
벌떡 몸을 일으켰다. 뷔가 내 몸을 흔들며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나를 내려 보고 있었다. 태형아! 나는 눈앞의 뷔를 덥썩 끌어안았다. 놀란 듯 움찔 몸을 떨던 그도 이내 내 등을 감싸 안았다. 빠르게 뛰던 심장이 진정 될 때까지 나는 태형이의 이름을 부르며 계속 뷔의 품에 안겨 있었다.
**
나는 그 꿈을 꾼 이후로 다짐했다. 좀 더 적극적으로 뷔를 돕기로. 하루빨리 그가 떠나야 나 또한 김태형에게서 해방이 될 것 같다는 예감이 들었다. 그래서 그가 찾으면 떠나겠다고 한 행성들에 대해 좀 더 자세히 물었다. 상상을 초월하는 헛소리라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그래도 별수 없다.
“작은 행성 세 개를 합쳐야 내가 살 큰 행성을 만들 수가 있어. 그동안 난 행성 없이 여기저기를 떠돌았거든.”
그러니까 큰 행성이라는 건 아마 집을 뜻하는 것 같다. 작은 행성 세 개를 모아야 자신이 살 수 있는 집이 생긴다는 거겠지.
“...암튼 그러다 중간에 토끼를 만나서 달까지 가게 된 거야. 달에서 술래잡기를 하다 넘어져서 그만 내 작은 행성들을 놓쳐버렸어. 근데 그게 모조리 지구로 떨어져 버린 거지.”
다시 들어봐도 참으로 참신한 헛소리다. 어쨌든 나는 그를 돕고 싶었기에 잠자코 있었다.
“내가 떨어뜨린 행성은 두 갠데, 얼마 전에 그 두 개를 다 찾았어.”
“뭐? 찾았다고?”
그럼 다 된 거 아냐? 순식간에 머리가 식으며 허무함이 밀려왔다. 내가 콧김을 뿜으며 묻자 김태형이 과장된 몸짓으로 손을 허리에 올리고는 짐짓 나를 노려보았다.
“내가 뭐랬어. 세 개가 있어야 한다니까!”
세 개. 태형이 다시 힘주어 말했다. 그러고 나서 주머니에 손을 넣고 꾸물대더니 꺼낸 손을 펼쳐 보였다. 불투명한 두 개의 구슬이 형광등에 반사되어 빛을 냈다. 나도 모르게 손을 뻗자 그가 재빠르게 손을 확 접었다.
“이 행성의 이름은 증오와 그리움이야.”
참으로 우중충한 이름이다. 믿음 소망 사랑이 더 낫겠다. 왜 그런 부정적인 감정으로 이름을 지었을까.
“그럼 아직 못 찾은 행성의 이름은 뭔데?”
“나도 몰라.”
“뭐? 그럼 어떻게 찾는다는 거야.”
“몰라. 그래서 내가 도와달라고 했잖아.”
너무도 당당한 언행에 말문이 막혀버렸다. 그러다 문득 그가 나를 고른 이유를 떠올렸다. 제일 마음에 들어서. 결국, 아무나 골랐다는 소리잖아! 절로 나오는 한숨에 고개를 숙이고 냉장고 쪽으로 걸음을 돌렸다. 내가 맥주를 꺼내자 김태형이 우다다 달려오더니 찬장을 뒤져 병따개를 꺼냈다. 헤헤 웃는 얼굴이 미운데 밉지 않아서 웃음이 난다.
“내가 딸래!”
한참을 낑낑대며 맥주병과 씨름을 하더니 결국 뻥 소리와 함께 따진 병뚜껑을 들고 활짝 웃는다. 그 모습이 꼭 신입생 환영회 때의 김태형 같아서 나는 다시 웃음을 잃었다. 모른척 하고 싶어도 자꾸만 쿵 내려앉는 마음이 그때의 설렘을 불러일으킨다. 결국, 한 모금도 마시지 못한 맥주는 테이블에서 식어버렸다.
**
‘사랑해 지민아.’
꿈에 또 김태형이 나왔다. 확실히 뷔와 지내고 나서 그 횟수가 빈번해진 것은 사실이다. 사랑해. 자꾸만 귓가를 뱅뱅 도는 음성에 도리질을 친다. 이럴 때면 포기하고 싶던 뷔의 행성 찾기에 다시 신경을 곤두세우게 된다.
가뜩이나 요즘 자꾸 그런 생각이 들었다. 그냥 계속 이대로 그와 같이 있으면 어떨까. 지민아. 하지만 잊을 수 없는 추억들이 거품처럼 불어나 온 마음을 뒤덮는다. 사랑해. 눈을 꽉 감다가 문득 화살촉이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그거 혹시 사랑 아니야?”
남은 행성의 이름 말이야! 내 질문에 뷔는 고개를 갸웃댈 뿐이다. 비눗방울이 둥실둥실 다가와 코끝에서 퐁! 하고 터졌다. 설거지를 한다더니 그릇에 가득 담긴 거품에 빨대를 넣었다 뺀다. 그러더니 후~하고 불자 커다란 비눗방울이 만들어졌다. 완전 커! 만족스러운 얼굴로 엄지를 치켜드는 그를 보며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사랑의 ‘사’자는 알려나 모르겠네.
“너의 사랑은 뭔데?”
“...나?”
예상치 못한 뷔의 질문에 나는 잠깐 말문이 막혔다가 이내 더듬더듬 입을 열었다. 뭐, 가족 간의 사랑 친구 간의 사랑....좋은 사랑 나쁜 사랑....그렇게 대충 둘러대다가
“아픈 사랑...”
그렇게 말하고 김태형을 떠올렸다. 마음을 막아도 아프고 내버려 둬도 아파서 그냥 힘쓰지 않기로 하자 툭툭 터져 나오는 감정들이 나를 자극한다. 뷔는 내 대답이 어땠는지 알려주지 않고 다시 몸을 돌려 마저 남은 설거지를 했다. 미끄러워서 몇 번이고 컵을 놓치는 사소한 모습조차 그와 닮아서 나는 또다시 마음을 누를 수밖에 없다.
**
달빛이 안개에 가려진 스산한 새벽. 나는 또 김태형의 꿈을 꾸다 잠에서 깼다. 이제는 막을 힘도 의지도 없어졌다. 천천히 창문을 열고 창턱에 걸터앉았다. 발을 창밖으로 뺀 후 교차로 흔들자 마치 공중 산책을 하는 것 같은 기분이 든다. 어쩌면 아주 어쩌면 내가 결국 너를 잊지 못하고 미친 게 아닐까.
헤어지자고 말하며 돌아서는 뒷모습을 잡으려 기를 쓰고 뛰어도 잡을 수가 없었다. 너는 많이 아팠을까. 그렇게 아픈데도 내가 걱정돼서 그런 이별을 고한 거니. 물어보고 싶은데 물어볼 사람이 없어.
달칵. 문소리가 나더니 열린 문틈으로 반짝이는 머리칼이 보였다. 안으로 들어선 얼굴은 뷔다. 어쩌면 태형이 일지도 모른다. 내가 미쳐서 만들어낸 그의 환영일지도 몰라. 그가 천천히 내게 다가왔다.
“왜 헤어지자고 한 거야?”
오랜 시간을 눌러놨던 그 질문이 이제야 입 밖으로 나오는 순간이다. 내가 없는 시간 동안의 넌 어땠니. 얼마나 아팠고 또 얼마나 외로웠어.
“그립고 그리웠고, 내가 밉고 미웠어.”
“....뭐?”
그의 말에 내 눈물이 멎었다. 그러고 보니 나 울고 있었다. 어느새 얼굴을 잔뜩 적신 눈물을 닦아내자 그의 얼굴이 더 선명하게 보였다. 꿈이 아니다.
“...태형아.”
“찾았다. 마지막 행성.”
그가 내 눈에 입을 맞춘다. 바람이 창을 향해 훅 끼치고 가지가 흔들려 잎사귀의 소리가 들린다. 어느새 개 버린 하늘에 달과 별이 뜬다. 그가 내 손을 잡고 당겼다. 창틀에서 내려온 나는 그의 품에 안겼고 그러자 기다렸다는 듯 눈물이 쏟아졌다. 미안해, 미안해... 우리는 같은 말을 되뇌며 같은 마음으로 서로를 더 꽉 안았다.
“역시 나머지 하나는 사랑이었어?”
울음이 멈춘 나를 달래던 태형이 떠다 준 물을 두 모금 마신 뒤 내가 물었다.
“아니.”
“그럼 뭔데?”
달빛 속에서 그는 나를 바라보며 웃었다. 정적이 차지한 찰나의 시간이 마음을 죄어왔다.
“아픔.”
어느새 그의 손엔 불투명한 구슬이 하나 더 늘었다. 달빛을 받은 행성들이 저마다 빛을 낸다. 마지막 행성의 이름은 아픔이야.
“안 돼. 가져가지 마.”
그렇게만 말했는데 내 마음을 알아챈 그가 내 머리를 살살 쓰다듬으며 나를 달랜다.
“우리의 추억과 마음을 잊게 하려는 게 아니야.”
“.....”
“아픔만.”
아픔만 덜어갈게, 지민아. 그의 입에서 나오는 말이 마음으로 흘러들어온다. 쿵쿵 뛰는 심장박동을 타고서 흘러들어 온다.
“마음이 울지 않게.”
천천히 고개를 내린 그가 입을 맞춰왔다. 하나둘 살아나는 감각들에 등 끝에 오소소 소름이 돋고 발끝이 찌릿했다. 자꾸만 가슴이 벅차서 엉엉 울어버리고 싶다. 머리를 죄어오던 금고아 같은 두통이 가셨다.
“가지마.”
그의 몸이 천천히 떠올랐다. 내가 그걸 알아챘을 때 그는 이미 내 손끝이 닿을락 말락 한 거리에 있었다. 마치 달빛이 그를 잡아당기고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너도 알잖아. 이제 우리가 그때로 돌아갈 수 없다는 걸.”
“이젠 태형이로든 뷔로든 상관없어! 계속 내 옆에 있어 주면 안 돼?”
바람이 멈췄다. 마치 무중력 상태가 된 것 같은 공간에서 그가 말한다. 마음이 같이 있으면 언제나 함께야.
“그러니까 너무 외로워하지도 슬퍼하지도 말고, 잘 살아 지민아.”
“너는 어디 가는데!”
“나는 이제 내 행성을 만들고 거기서 꽃도 심고 비눗방울도 불거야. 가끔 달에 놀러가서 니가 사는 행성을 보며 니 생각도 할 거고.”
영영 못 잊을지도 몰라. 내 말에 그가 답했다. 힘들면 천천히 해. 내일도 힘들면 그다음 날로 계속 미루고 미뤄도 괜찮아. 살면서 겪은 그리고 겪을 이별이 많겠지만 그만큼 만남 또한 무수하니까. 그렇게 천천히 잊다가 새로운 사랑을 만나게 될 거야. 그래서 오래오래 행복하게 살다가 와.
점점 달빛에 그의 형체가 흐려졌다.
“나중에 다시 만나면 그 오래오래 행복하게 살았던 네 이야기를 들려줘.”
모든 것이 어두워졌다.
**
학교를 마친 후 집에 와 녹초가 된 몸을 씻었다. 이번 학기만 마치면 다시 한국으로 돌아간다. 가족들과의 영상통화를 마친 후 냉장고를 열었다. 주스를 꺼내 마시는데 테이블 위에 있는 병따개가 눈에 들어왔다. 저게 왜 저기 있지? 병따개를 찬장에 올려두는데 싱크대에 빨대가 가득하다. 이건 또 뭐야... 이쯤 되면 무서울 법도 한데 허전한 마음이 더 컸다. 빨대를 버리고 부엌을 나오자 거실 창으로 들어온 달빛이 오늘따라 참 밝다.
....그러다
그러다가
달처럼 떠오른 얼굴이 있다. 봐, 이렇게 모르는 척해도 안 잊히잖아. 병따개를 올려놔도 빨대를 버려도.
마음이 같이 있으니 함께라는 말을 떠올렸다. 아픔을 가져가고 마음을 두고 갔잖아. 나는 콧노래를 부르며 지금쯤 행성을 짓고 꽃을 심고 있을 그를 떠올려 본다. 잊기를 내일로 미루면서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