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

[랩민] Grab me 上

빛달 2017. 10. 4. 06:56

 

 

 

지민은 불타는 연애를 하고 싶었다. 마음도 육체도 뜨겁고 정열적인 그런 사랑을 해 보는 것이 요즘 최대 관심사다. 하지만 현실은 바람나서 헤어진 구남친을 상사로 둔 운도 지지리 없는 말단 인턴의 신세였다. 지난주 지민은 연기가 퐁퐁 피어오르는 세탁소 앞에서 팀장님(a.k.a구남친)의 옷을 찾아 나오며 다짐했더랬다. 불타는 연애까진 못 가더라도 불타는 밤이라도 보내보자고. 싱글이 된 지 1년 차, 생각보다 보수적인 편이고 순정파인 지민은 쉽게 사람을 만나는 타입은 아니었기에 원나잇은 먼 나라 이야기였지만 이번엔 확실하게 결심이 섰다. 까짓거 나도 불타는 밤 한번 보내 보쟈!

 

호기롭게 다짐해놓고는 겨우 용기를 내 도착한 게이 클럽에서 지민은 쿵쿵 요동치는 심장을 몇 번이나 꾹꾹 눌렀는지 모른다. 좀 진정된 것 같아서 클럽 안에 들어갔다가 쿵짝쿵짝 울리는 음악소리 때문에 심장이 더 빠르게 뛰다 못해 울렁거리는 지경이 됐다. 물색은커녕 겨우 적응해가던 차에 불쑥 낯선 사람들이 말을 걸어오기 시작했다. 다짜고짜 볼을 만지는 사람부터 반말하는 사람, 그 둘을 다 하는 사람까지.

 

 

 

아니 원래 여기선 다들 이런 식으로 만나는 건가? 질색하며 피하기만 하던 지민은 결국 제풀에 지쳐 저 테이블 구석자리에 처박혀 방금 막 나온 칵테일이나 홀짝 대는 신세가 되었다. 이름을 몰라서 그냥 아무거나 찍어 시켰는데 다행히 맛은 나쁘지 않다. 그래 인생이 생각대로 풀리면 얼마나 좋겠냐... 지민이 푹푹 한숨을 쉬던 그때 옆으로 한 남자가 다가와 앉았다.

 

 

 

'귀엽네 몇 살?‘

 

 

 

지민이 대꾸를 하지 않는데도 자꾸만 말을 건다. 마지못해 팔을 휘휘 내저으며 저리 가라는 모션을 취하는데 다짜고짜 손목이 잡혔다. 술 잘 마셔? 라고 말하던 남자의 입이 손에 들린 술을 머금더니 천천히 지민의 입술을 향해 다가왔다. 이런 미친, 갑자기 이게 무슨 상황이야...? 잡힌 손목을 비틀던 지민이 고개를 뒤로 빼며 박치기를 하려던 찰나.

 

 

 

싫다잖아요.’

 

 

 

남자의 어깨가 틀어지더니 바닥으로 넘어졌다. 금세 벌떡 일어나 싸울 태세로 식식대던 남자는 저를 내친 남자를 위아래로 훑어보고는 금방 꼬리를 내렸다. 딱 봐도 비싼 명품만 입었다. 나이도 그리 많아 보이지 않는 것으로 보아 부잣집 귀한 자제일 가능성이 농후했으므로 남자는 몸을 사리기로 하고 그 자리를 피했다. 힐끔대던 사람들도 저마다 제 자리로 떠나고 멍하니 술만 홀짝이던 지민은 남아있는 남자를 올려봤다.

 

 

검은색 수트를 쫙 빼입고 선글라스를 낀 모습이 참 인상적이었다. 물론 다 비싼 명품이지만 쥐꼬리만 한 월급으로 생계를 이어가는 말단 인턴사원인 지민은 그것까진 몰랐다. 근데 이렇게 어두운 곳에서 저렇게 까만 선글라스를 끼면 불편하지 않나..? 지민은 자신도 모르게 남자의 선글라스로 손을 뻗었다. 놀란 남자가 당황한 손짓으로 내려가려던 선글라스를 붙잡았다. 지민에게로 닿던 찰나의 눈빛이 다시 선글라스로 인해 가려졌다.

 

 

 

 

‘...우응...벗으면 안돼여?’

 

 

‘...?’

 

 

벗은게 더 멋있을 것 같은데에...’

 

 

 

 

지민은 부디 이 기억이 날조이길 100번도 넘게 기도한 것 같다. 말꼬리를 죽 늘리며 헤실헤실 웃던 게 부디 자신의 모습이 아니길....생각보다 칵테일의 도수는 높았고 지민은 그때부터 한창 취해가고 있었다. 술이라곤 회식자리서 소맥만 말던 지민에게 칵테일 역시 먼 나라 술이었던 것이다. 그 이후로 몇 번 대화를 나눈 것 같은데 가물가물 하다. 겨우 조각난 기억에서 겨우 생각해 낸 거리곤 나갈래요? 하는 남자의 손을 꼬옥 맞잡던 제 손뿐이었다. 그리고 정신을 차렸을 땐 아침이었다. 창살을 넘어오는 햇살을 맞으며 지민은 몸을 뒤척이다가 생전 처음 느껴보는 포근하고 부드러운 이불의 감촉에 번쩍 눈을 떴다. 뭐지. 그리고 눈앞에 보이는 낯선 풍경에 벌떡 몸을 일으켰다. 찌르르 등을 타고 아픔이 전해졌다. 으으 대체 뭐지뭐지뭐지...??

 

 

 

으리으리하고 좋아서 누군가의 집이라고 생각했던 그곳은 호텔이었다. 세상에 저렇게 넓은 객실도 있구나. 체크아웃이고 뭐고 따질 정신도 없던 지민은 일단 그곳을 빠르게 벗어났다. 가까운 편의점에 들어가 생수를 계산하고 벌컥벌컥 마시다 중간에 코끼리처럼 푸우 물을 뿜어버리고 말았다.

 

하아, , 조금만......천천히..! 기억 속의 영상은 흐릿한데 몸의 느낌과 흐르던 땀 그리고 외쳐대던 신음들이 조각구름이 되어 스물스물 머릿속에 떠올랐다. .

 

일냈구나 박지민.

 

 

그렇게 원하던 불타는 밤을 보냈지만, 첫 소감은 경악이었다. 진짜로 이렇게 쉽게 막 그렇게 될 줄 몰랐......

 

 

그날이 일요일이었으니 망정이지 평일이었다면 지민은 최초로 무단결근을 감행했을지도 모른다. 그래 뭐 처음엔 자신의 일탈에 크게 놀라긴 했는데 점차 시간이 지나고 나니 그건 또 그때뿐 오히려 점점 억울해 지는 것이었다. 그 남자도 참 웃기지, 메모나 인사도 없이 그렇게 매몰차게 가버리냐. 일주일이 지난 지금은 애써 체념하는 중이었다. 그래 생각해보면 아침에 서로 인사하고 가는 것도 모양이 우습긴 해. 원나잇은 깔끔하게 하는 게 좋다잖아.....

 

까만 선글라스 말고는 떠오르는 게 없는 남자를 생각하며 지민은 푹푹 한숨을 쉬었다. 혹시 내가 별로...였나? 아니 먼저 나가자고 한 게 누군데.... 꼬리에 꼬리를 무는 생각을 휘휘 저었다. 다시 돌아온 현실에서 지민의 옆에 있는 거라곤 오늘도 같은 잡일로 구박을 하는 구남친 팀장님뿐이다.

 

 

 

 

 

 

 

 

 

 

 

***

 

 

지민은 본인이 참 남자 복이 없다고 생각했다. 처음 자신을 좋다고 따라다닌 남자는 하필 유부남이었다. 첫 애인이었던 구남친은 바이인데, 지민과 동시에 다른 여자를 사귀고 있던 것을 걸려서 뻥 차였다. 말이 찬 거지 당시에 적반하장으로 니가 이해 좀 해주면 안 되냐는 말까지 들었다. 혈압이 있는 대로 올라서 죽빵을 갈기고 구치소라도 가고 싶었지만 그래도 마음씨 고운 지민은 옛정을 생각해서 조용히 헤어지는 선으로 정리했다.

 

그런데 하필 얼마 뒤에 부서이동이 있었고 원수는 외나무다리에서 만난다고 하필 상사와 부하직원으로 재회한 두 사람은 처음엔 껄끄럽긴 해도 별 탈 없이 흘러가는 듯했지만 먼저 불씨를 던진 건 구남친 쪽이었다.

 

 

그래 그 바람둥이 기질 어디 갈 리가 없지. 여전히 여자친구와 잘 만나고 있으면서 은근한 스킨십까지 해대며 지민에게 다시 만나자고 추근대기 시작했고 참다못한 지민은 회식 자리에서 술기운을 빌려 그를 따로 불러내 들고 있던 서류가방으로 냅다 후려쳤다. 내 인생에서 제발 꺼져 화상아!

 

 

그날 이후로 치졸하고 유치한 구남친의 괴롭힘이 시작되었다. 가뜩이나 부서이동 때문에 지민이 잡지회사 2년 차에 단 에디터 명칭은 일개 인턴으로 하향조정 되었고 그런 그를 안쓰러워하는 동료들과는 달리 구남친은 쌤통이라는 얼굴로 온갖 잔심부름을 시키기 시작했다. 처음엔 회사에 국한된 일들이었지만 시간이 지나니까 별 거지같고 개인적인 심부름을 다 시켜댔다. 세탁소에서 자기 옷 다려 오기 같은.

 

 

그리고 지민이 퇴근하는 시간인 8시에 맞춰 하루를 시작하는 사람이 있다. 바로 지민의 옆집 남자. 같은 져지를 매일 색만 다르게 목까지 채워 입고 커다란 뿔테안경을 쓰고 다니는 남자.

 

 

 

 

안녕하세요.”

 

 

“..., 네 안녕하세요.”

 

 

 

 

단촐한 인사를 나눈 후에 정면을 보면 늘 지민은 자신을 빤히 바라보는 시선을 느꼈다. 고개를 돌려 마주하면 피해버린다. 다시 돌리면 또다시 바라보는 시선. 지민은 촉이 좋은 편은 아니지만 어렴풋이 느꼈다.

 

 

 

 

백퍼 나한테 관심 있다니깐

 

 

또 그 옆집남자 얘기냐? 몇 번째야 이쯤 되면 니가 좋아하는 거 아냐?”

 

 

 

 

아니거든요! 호석의 질문에 지민이 난색을 하며 맥주를 들이켰다. 노란 불빛이 켜진 룸 술집에서 감자튀김과 그라탕을 시켜놓고 맥주한잔을 하는 중이었다. 호석이 텅 빈 그라탕 접시 뒤에 있던 마카로니 과자를 끌어왔다.

 

 

 

 

왜 좀 별로야?”

 

 

아니 뭐 별로 까진 아닌데....”

 

 

별로까지는 아니지만 넌 아예 관심이 없다?”

 

 

관심이 없다기보단...”

 

 

 

 

거봐, 있네! 있어. 안 그래도 홍조가 오른 지민의 볼이 더 붉어지는 것을 본 호석이 호탕하게 웃었다. 솔직히 관심이 아예 없다면 거짓말이긴 한데, 그게 뭔가 확실하게 짚을만한 감정은 아니었다. 그러니까 연애의 싹이 되진 않을 것 같은 감정.

 

 

까치집 머리에 목까지 끌어올린 져지와 뿔테안경 그리고 슬리퍼만 신고 다니는 그 남자는 늘 집에만 있다가 가끔 출몰해서 정확한 직업을 알 수 없지만 그를 아는 주민들은 모두 그를 백수로 추정하고 있다. 낮엔 거의 자는 듯하고 지민이 퇴근하는 시간인 저녁 8시부터 활동을 시작한다. 그래서 지민은 처음 이사 왔을 때 옆집이 빈 집 인줄 알았었다. 퇴근길에 우연히 마주치고 나서 뒤늦게 이사 떡을 줬더니 고맙다고 웃었다. 웃는 얼굴이 보기 좋긴 한데 머리가 산발이라 좀 바보 같았다.

 

 

가끔 동네아줌마들에게 걸려 잠이 덜 깬 얼굴로 짐을 나르고 있는 모습이라든지, 그마저도 덜렁거려서 잃어버리거나 깨먹는 일이 다반사였다. 캣맘 아주머니의 부탁으로 새벽엔 길냥이 밥 주는 일을 도맡아 했는데 가끔 지민이 야근을 해서 늦게 퇴근할 땐 허허실실 웃으며 길냥이와 놀아주는 그의 모습을 목격한 적도 있다. 그의 손엔 고양이가 할퀸 자국이 가득했다.

 

마주치는 일이 잦더라도 대화할 일은 별로 없어서 오다가다 인사만 하던 사이었는데 언제부터인지 자꾸 옆집 남자가 지민을 말없이 뚫어져라 훔쳐보기 시작했다. 대놓고 물어보고도 싶은데 자꾸 안 그런 척 고개를 돌리니 뻘쭘하기도 하고.....뭣보다 지금은 지민이 스스로 결론을 내린 지 오래다. 옆집 남자는 나를 좋아해.

 

, 모르겠어 다...그냥 연애가 하고싶을 뿐이야 난.”

 

니가 왜 갑자기 그렇게 연애연애 하는지는 모르겠지만 그래도 그 쓰레기 자식은 진짜 절대 생각도 하지 마.”

 

호석이 지민의 구남친을 언급하며 돌 씹은 표정을 했다. 지민이 남은 맥주를 벌컥벌컥 들이키고는 탕 소리 나게 내려놓고 소매로 입을 훔쳤다.

 

 

절대 안 하지 절대! 내가 연애 시작하면 대놓고 걔한테 만큼은 티 내고 자랑할거야!”

 

그리고 마카로니 과자를 잘근잘근 씹어 먹었다. 찌질한 구남친, 불타는 밤을 보내놓고 연락처 없이 사라진 클럽남, 지민이 원하는 불타는 로맨스에는 적합하지 않아 보이는 옆집 남자. 그래서 운명의 나침반은 어디로 향하게 될까.

 

 

 

 

 

 

 

 

***

 

 

 

지민과 같은 잡지회사에 다니는 호석은 촬영팀에 속해있었다. 미리 나와 장비 세팅과 리허설 촬영에 여념이 없느라 바쁜데 지나가던 지민의 구남친이 호석에게 지민의 행방을 묻고 갔다. 곧 오겠죠. 하긴 했는데 벌써 시간이 9시를 넘어가고 있었다. 어제 좀 소맥을 과하게 말고 달린다 싶었는데 이런 날 지각이라니. 오늘 인터뷰할 셀럽은 유명한 작가였는데 서면 인터뷰 외엔 얼굴을 잘 비추는 편이 아니라서 이번 인터뷰는 그야말로 세간의 주목을 받는 중대한 일이었다. 총 세 부서가 이번 기획을 맡았으며 지민의 부서 또한 그중 하나였다.

 

 

이런 날에 지각이라니. 안 봐도 구남친에게 대차게 혼날 지민이 눈앞에 선했지만 호석 또한 눈코 뜰 새 없이 바빴기에 오늘은 쉴드가 좀 힘들 것 같다.

 

 

 

그래서 오늘 아침 지민을 깨운 건 알람이 아닌 경보음이었다. 삐삐삐삐!! 숨통을 죄이듯 울려대는 소리에 지민은 벌떡 자리에서 일어나다 목을 삐었지만 아파할 겨를도 없이 핸드폰부터 찾아 쥐었다. 그 경보음 소리는 구남친 지정 벨소리였기 때문이다. 그는 구남친이기 전에 지민의 상사 즉 팀장이다.

 

 

여보세요?

 

 

전화를 받음과 동시에 지민의 눈이 시계를 향했다. 95. 망했다. 지각도 이런 대 지각이 없다. 지민은 눈을 질끈 감고 팀장님 a.k.a 구남친에게 제정신이야! 부터 시작해서 온갖 욕설과 폭언을 들어야했다. 죄송함다 죄송해여! 연신 죄송만을 외치며 대충 옷을 꿰입은 지민이 황급히 현관을 나섰다. 그러다가 다시 들어와서 깽깽이걸음으로 어제 세탁소에서 찾아온 구남친의 옷을 챙겨나갔다.

 

 

 

 

이번 일이 얼마나 중요한지 몰라?”

 

 

“...죄송합니다.”

 

 

아무리 일개 인턴이지만 그렇게 빠져있는 게 말이 돼? 니가 더 열심히 빠릿빠릿해야 윗사람들이 수월하게 움직일 거 아냐!”

 

 

 

 

출근과 동시에 구남친은 팀장실로 지민을 끌고갔다. 블라인드를 쳐 놓고 한참을 혼내는데 처음엔 마냥 죄송하던 지민의 마음속에서 슬금슬금 반항심이 깨어나던 차였다. 아니 그렇게 바쁘다면서 여기서 이렇게 계속 야단만 치고 있을 건가...

 

 

 

 

안 되겠다 너. 들어와라 우리 집으로.”

 

 

?”

 

 

같이 살자 지민아.”

 

 

 

 

또 시작이다. 자연스레 공에서 사로 이어지며 바뀌는 음흉한 말투. 그때 서류가방이 아닌 몽둥이로 팼어야 하는 건데. 지민이 바로 도끼눈을 뜨자 구남친이 큼큼 헛기침하며 허공을 바라본다.

 

 

 

 

아니, 같이 살면서....일도 좀 배우고 너 이렇게 지각할 일도 없게 출근도 같이하면 좋잖아. ?”

 

 

지민은 싫다는 대답조차 아까워서 조용히 중지 손가락을 치켜들었다. 산을 표현하는 수화다. 부디 깊은 산속으로 꺼져달라는 염원을 담은.

 

 

 

 

“..이번에 우리 인터뷰하는 셀럽 알지?”

 

 

, 김남준 작가님이요.”

 

 

 

 

지민은 혹시 저가 모를까 봐 책잡으려 물어보는 건 줄 알고 재빨리 대답했다. 손가락을 부러뜨릴 기세로 날뛸 줄 알았는데 돌아온 건 의외의 질문이어서 조금 어리둥절한 표정이 됐다.

 

 

 

그 작가 하고 나, 잘해보려고.”

 

 

 

..뭐지. 지민이 멍한 얼굴로 올려다보자 구남친이 지민의 앞머리를 슥슥 쓸며 즐겁다는 듯 미소지었다.

 

 

 

내가 같이 살자고 한 게 내가 너한테 준 마지막 기회였다고.”

 

 

 

 

마지막이라는 말에 지민의 얼굴에 화색이 돈다. 무슨 헛소린지는 모르겠는데 마지막 이란 단어 만큼은 그리 또렷하게 들릴 수가 없었다. 그런 지민을 본 구남친의 언성이 조금 높아졌다.

 

 

 

 

그러니까 다신 너한테 안 간단 말이야! 알겠어? 우리 완전히 쫑이라고! 끝 게임 오버!”

 

 

 

 

그러든 말든 지민은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저 거머리 같은 자식 입에서 끝이라는 단어를 듣다니. 역시 사람이 재수가 나쁘기만 하란 법은 없나 봐.

 

 

 

 

, 이제 남준씨 여기로 올 시간이다. 내가 인터뷰 전에 잠깐 만나기로 해서. 그만 가 줄래?”

 

 

“...그래. 잘해봐. 그동안 더러웠고 다신 일 외로 만나지 말자 우리.”

 

 

 

 

알겠지? 지민이 구남친의 정강이를 냅다 걷어찼다. 억울하고 짜증 나는게 한 둘이 아니었으므로 이 정도면 많이 참은 거였는데 구남친은 그렇지 않았나보다 야악!!! 빽 소리를 지른 그가 지민을 다짜고짜 벽으로 밀쳤다. 구남친의 팔 안에 갇힌 지민이 고개를 숙이려 하는데 양 볼이 꾹 잡혀버렸다.

 

 

 

 

자꾸 봐주니까 까불지?”

 

 

놔라, 좋은 말로 할 때!”

 

 

? 옛날 생각나고 좋지 않아? 마지막으로 키스 정도는 해 줄게.”

 

 

싫어 미친놈아!”

 

 

 

 

휴대용 몽둥이를 하나 사 둘 걸 그랬다. 지민은 하는 수 없이 어깨라도 콱 깨물어버리려 몸을 트는데 벌컥 문이 열렸다. 싫어 저리 가! 하는 지민의 외침이 너무 커서 구남친은 문이 열렸다는 사실을 모르는 것 같았다.

 

 

 

 

싫다잖아요.”

 

 

 

 

지민의 기시감은 여기서부터 시작됐다. 지민에게서 떨어져 나간 구남친이 있는 대로 인상을 썼다가 반색을 하며 다시 몸을 일으켰다.

 

 

 

 

, 작가님! 죄송합니다. 직원 교육 좀 하느라...”

 

 

그러시군요. 저는 김남준이라고 합니다. 여기 팀장님을 뵈러 왔는데요.”

 

 

 

 

남준이 고개를 숙여 인사하자 지민과 구남친의 허리도 절로 숙여졌다. 땅을 보는 지민의 시야에 검은 로퍼가 다가섰다. 고개를 들자 반듯한 검은 수트 차림에 무심하게 넘긴 머리, 눈꼬리가 내려갔지만, 눈빛이 날카로운 남자가 제 앞에 서 있다. 그러니까 이분이 김남준 작가님...

 

 

 

 

그 쪽이 팀장님인가요?”

 

 

“...? 저요?”

 

 

 

 

아닌데요. 지민이 고개를 좌우로 저으며 답했다. 앞에 구남친이 했던 대사나 상황으로 보아 누가봐도 팀장은 저쪽이지 내가 아닌데....지민이 쩝 입맛을 다시며 구남친을 힐끗 바라보자 억지로 웃는 눈에 경련이 일고 있는 게 들어왔다. 팀장은 접니다.

 

 

 

이렇게 뵙게 돼서 영광입니다 남준씨.”

 

 

, 그럼 저한테 끝나고 차 한잔하자고 메모를 남긴 신게...”

 

 

네 저 맞아요.”

 

 

 

 

, 설레발 치며 메모를 남겼을 구남친의 모습이 떠올라 지민은 속으로 비웃었다. 그런 지민의 의중이 보이는 건지 구남친이 지민 쪽에 잠시 시선을 던지고 사람 좋아 보이는 웃음을 지었다. 의도적으로 지민의 속을 긁어놓겠단 심산에서였다.

 

 

 

 

남준씨를 보자마자 저도 모르게 끌리는 뭔가를 느꼈거든요. 제가 고민도 많고 생각도 많은 편인데 좀 더 심도 있는 대화를 나누면서...”

 

 

, 제가 좀 바빠서요.”

 

 

 

 

단호박인 줄. 지민은 터질 뻔한 웃음을 삼키느라 허벅지를 꼬집었다. 구남친의 얼굴이 당혹감으로 물들었다. 뭐라 말을 이으려는 것을 막고 남준이 손바닥을 들어 지민을 가리켰다. 할퀸 흉터가 보인다. 째깍대는 규칙적인 초침소리에 맞춰 심장 뛰는 소리가 들린다. 꿀꺽 침을 삼키는 지민을 보며 내내 무표정이었던 남준이 미소를 지었다.

 

 

 

 

저는 이분이 남긴 메모인 줄 알고 왔거든요.”

 

 

 

 

그 순간 심장이 쿵 꺼졌다 다시 빠르게 뛰었다. 와 지엄한 분위기에 가려져서 몰랐다. 마주한 적은 별로 없지만, 저 얼굴을 안다. 늘 먼저 바라봤고 돌아서 마주하면 피하던 그 얼굴. 그러니까 마주한 적이 언제더라....

 

 

 

 

그러고 보니 우린 옆집 사는 사이면서 서로 이름도 모르네요.”

 

 

 

 

, 이사 떡.

 

 

밀폐된 공간인데 어디선가 바람이 불어오는 것 같은 착각이 들었다. 지민은 그것이 나침반이 다시 돌아가고 있기 때문임을 그때는 몰랐다.

 

 

 

 

저기, 뭔가 착각하셨나 본데 그쪽은 아니에요.”

 

 

 

정신을 차린 구남친이 지민과 남준의 사이에 다가섰다. 저 말은 남준과 지민이 아는 사이일리 없다는 그의 추측에서 기인한 것으로 아무튼 그쪽 즉 지민 쪽이 아니고 제 쪽으로 오는 게 맞다는 의미었다. 그런데 남준은

 

 

 

 

“...? 아닌데 게이 맞는데....”

 

 

 

 

그 그쪽을 다르게 알아들었다. 지금 세 사람의 속마음은 제각각이지만 머리 위에는 물음표와 느낌표가 한데 어우러져 행진을 하는 중이었다. 와 촉은 무시 못 한다더니 뭐야... 이게 바로 게이더라는 건가. 지민은 입 안쪽 살을 잘근잘근 씹었다. 아닌데여

 

 

 

 

저 게이 아닌데...”

 

 

 

 

그래요? 남준이 짐짓 어두운 낯빛을 하다 이내 지우곤 어깨를 으쓱 올렸다. 그럼

 

 

 

 

그럼 왜 나랑 잤나요?”

 

 

“...? 그게 무슨...”

 

 

 

 

구남친의 갈굼에도 멀쩡하던 사고회로가 일순간 정지했다. 지민이 말을 잇지 못하고 있는데 갑자기 문이 벌컥 열리더니 스탭 중 하나가 뛰어들어왔다.

 

 

 

 

, 작가님 여기 계셨네요. 지금 바로 스탠바이 해주세요!”

 

 

“....”

 

 

 

 

스탭의 뒤를 따라 남준이 나가자 잠자코 있던 구남친이 지민의 멱살을 잡았다. 동시에 지민의 핸드폰이 울렸다. 멍한 얼굴로 주섬주섬 꺼내 보자 에디터 선배의 전화였다. 자신을 찾고 있는 전화겠구나 싶어 받으려는데 구남친이 힘을 주어 지민을 벽에 밀치는 바람에 핸드폰이 바닥으로 떨어졌다.

 

 

 

 

너 뭐야, 잤다는 건 뭐고. 대체 뭘 하고 다니는...”

 

 

비켜봐.”

 

 

 

 

이미 벗어났어야 할 기시감이 거세지더니 둑을 터뜨려 다른 방향으로 흐른다. 눈앞에 떨어진 케이스에 감싸진 핸드폰의 뒷면이 눈에 한가득 들어왔다. 물끄러미 바라보다 천천히 주워들었다. 가끔 그럴 때가 있다. 잊고 있던 기억이 갑자기 번뜩 생각날 때.

 

 

 

어슴푸레한 새벽. 간지럽게 앞머리를 쓸던 손길. 살짝 눈을 뜨면 들어오는 어둠이 내린 얼굴. 내가.. 중요한 일이 있어서 먼저 가 봐야 해요. ...왜요? 미안해요, 내 명함 주고 갈 테니까 이따가 깨면 꼭 연락해요.

 

 

 

잠결에도 그게 중요하다 싶어 손에 꼭 쥐고 졸다가 다시 일어나 폰케이스 뒤쪽에 넣었다. 아찔하리만치 몰아쳐 온 기억에 지민의 손이 떨렸다. 비밀의 상자를 열 듯 조심스럽게 케이스를 벗겨내면 툭 손 위로 떨어지는 종이. 명함. 김남준.

 

 

 

 

이번에 지민의 잡지사에서 인터뷰할 셀럽은 김남준 33세 직업은 작가고 지민의 옆집에 살며 클럽에서 만난 지민과 불타는 하룻밤을 보낸 남자.

 

나침반이 멈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