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의가 한 시간밖에 없는 날이다. 태형은 늦잠을 자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으나 차마 전공 시간이니 빼먹을 수는 없고 끝나자마자 돌아가서 군것질을 잔뜩 하고 종일 잠을 잘 계획을 세우며 길을 나섰다. 뻐근한 목을 이리저리 돌리던 태형은 하늘을 보고 걸음을 멈추었다. 푸른빛의 맑은 하늘에 새떼들이 지저귀며 지나가고 있었다. 햇빛을 받은 구름이 반짝이고 나뭇가지에 걸린 구름은 꼭 솜사탕 같았다. 아 솜사탕 먹고 싶어. 분홍색으로. 입맛을 다시며 솜사탕이 마트에도 팔던가? 하는 생각을 하다 보니 어느새 학교 앞이었다. 늦장 부린 주제에 여유 부리며 온 것 치고는 꽤 일찍 도착한 편이었다. 지각만 안 하면 되지 뭐 하며 솜사탕 노래를 휘파람으로 불던 태형의 귓가에 피아노 소리가 들려왔다. 음대생이다 보니 피아노 연주는 질리도록 자주 듣는데도 오늘따라 하늘처럼 예쁘게 들렸다. 들려오는 연습실을 찾아 기웃기웃 고개를 내밀던 태형은 그대로 멈춰섰다. 눈에 들어오는 광경이 덮치듯 밀려와서 온몸이 잠긴 것 같았다. 지나가는 사람이 보는 태형은 풀린 동공에 힘없이 벌어진 입술의 멍 한 표정이다. 원래 마음에 들면 구경하는 것을 좋아하는 태형이지만 가장 마음을 송두리째 사로잡힐 때 나오는 반응이 저 반응이었다. 아직 정오도 채 되지 않은 시간인데 이 공간에만 밤이 내린 것 같이 느껴졌다. 햇살이 비추는 푸른 낮도 좋지만 태형이 가장 좋아하는 하늘은  별이 보이고 달이 보이는 밤하늘 쪽이었다. 완전히 깜깜한 밤보단 저녁에서 밤으로 넘어가는 하늘. 보랏빛도 보이고 잿빛도 보이고 여러 색깔이 어우러진 가운데 뜬 달과 별 그리고 밤공기. 그 공간의 공중에서 날아다니는 듯하다가 헤엄치는 것 같기도 했다가 미끄러지다 팔랑팔랑한 몸짓. 정신을 차릴 수가 없이 아득해진 태형이 한 걸음 한 걸음 다가서며 저도 모를 감탄사를 뱉기 시작했다. 그러자 피아노 소리가 멈추고 동시에 이쪽으로 돌아서는 무용수의 얼굴에 태형은 헙 입을 다물었다. 꿈을 꾸다 깨어난 것 같다. 새의 지저귐 소리와 함께 바람이 훅 끼쳤다.

 

 

"김태형? 여기서 뭐해?"

 

"...지민아"

 

 

지민이 땀을 닦으며 태형을 향해 웃어 보였다. 열린 창으로 들어오는 바람에 금빛 머리칼이 살랑거렸다. 와 진짜 달 같다. 태형은 중얼거리며 발걸음을 옮겼다. 어느새 코앞으로 가까워진 머리카락을 만지작거리자 지민이 머리를 이리저리 흔들며 웃는다. 하얀 웃음이 진짜 보름달 같아서 태형은 문득 저가 다시 아까의 그 밤의 공간으로 끌려가는 것 같은 착각마저 들었다. 이상한 울렁거림이 지속한다. 대체 이 기분은 뭘까? 라는 의문에 나는 금발 성애자다. 라는 명제를 걸어보았다. 허나 지민 외에 금발에 꽂힌 적도 없었고 지금 마주한 지민이는 금발보단 먼저 무용하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기 때문에 그런 건 또 아니지 싶었다. 결국, 머리를 굴리고 굴려 봐도 더 큰 의문만 눈덩이같이 불어 날 뿐 아무런 소득이 없다. 그렇다고 앞에 있는 지민을 붙잡고 물어볼 수도 없어서 그저 멍하게 바라보는데 태형에게서 물러난 지민이 사뿐한 걸음으로 아까의 동작을 살짝살짝 반복해서 연습하기 시작했다.

 

 

"진짜 멋지다."

 

"어?"

 

"너 정말 춤 잘 춘다. 지민아."

 

"됐어 절루가"

 

 

지민이 손을 휙휙 휘저으며 웃었다. 연습을 멈추고 뒤에 있던 생수병 집어 든다. 돌려 따는 작은 손을 보다가 그대로 고개를 젖혀 물을 넘기는 목젖을 보며 태형은 침을 꿀꺽 삼켰다. 지민이 춤추던 모습이 자꾸만 자동재생되어서 눈을 감았다. 그랬더니 오히려 선명해지는 모습에 태형은 이번엔 한쪽 눈만 감아보았다.

 

 

"뭐하냐 너 왜 윙크를 하고 그래?"

 

"지민아 너 내꺼할래?"

 

 

로맨스 장르에나 나올 법한 태형의 말과 행동에 지민이 잠시 얼굴을 굳혔다가 이내 웃음을 터뜨렸다. 아직도 썸 탄다는 소문이 종종 들려와서 태형의 과한 행동이나 오해를 불러일으키는 언사들이 신경쓰이긴 했지만 정작 당사자의 의도는 엉뚱한데 있을것이 뻔했다. 좋아하면 갖고싶어하는 성미상 언젠간 저 말이 나오지 않을까 했던 적도 있어서 별로 놀랍지도 않았다. 태형이 제일 먼저 꽂혔던 건 금발머리였고 오디션 준비차 다시 염색한 금발이 태형을 다시 자극 한 것 같았다. 금발이 잘 어울린다는 주변인들의 말을 기분 좋게 들어 넘겼지만 태형의 반응을 보면 정말 금발이 꽤 어울리긴 한가 보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여태까지 내가 너한테 반한것 중에 이게 젤 근사한것 같아."

 

"너 금발머리 되게 좋아한다. 너도 해봐 잘어울릴 것 같은데"

 

"아니 금발 말고 니 춤 좋아. 아 금발도 좋은데...그니까 난 니가 춤추는거 진짜 좋아"

 

 

어? 지민의 눈이 커지고 입술은 삐쭉 말려 올라갔다. 내꺼할래 라는 말을 했을 때는 아무렇지도 않더니 니 춤 좋아. 라는 말에는 왜 손끝이 저리고 코끝이 시큰해지는지 모를 일이다. 잘한다. 잘 춘다. 기대가 크다. 열심히 한다. 라는 말은 들어봤어도 좋아 라는 말은 처음이었다. 좋다니.. 내 춤이 좋대. 너 좋아해 같은 고백도 아니고 춤이 좋다는 말에 마음이 벅차오르다니. 마음속 남아있던 실망감과 무력감이 겨우 저 한마디에 사그라지는 것 같았다. 겨우 저 한마디에.

 

 

"사랑놀음은 좀 나가서 하지 그래?"

 

"저희 그런 사이 아니거든요"

 

 

보다 못한 반주자의 말에 태형이 손사래를 치며 말했다. 방금 전에 내꺼하자 라는 말을 내뱉을 땐 언제고 이제 와 부정이라니 정말 신빙성이라곤 없어 보였지만 모든 게 귀찮아진 반주자는 자리를 털고 일어섰다. 먼저 간다 하는 뒤통수에 밝게 인사한 지민이 휙 하고 태형을 돌아봤다.

 

 

"야 석진이형이 밥 먹쟤. 같이 갈래?"

 

"그 형은 무슨 밥 먹으러 학교 오는 것 같지않냐"

 

 

끄덕임으로 동조를 표하는 지민의 머리를 태형이 자연스레 살살 만지며 함께 연습실을 나섰다. 뒤늦게 전공 수업이 떠올랐지만 지민의 웃는 옆 모습을 보느라 다시 까마득 태형의 머릿속에서 멀어졌다. 동그랗게 올라간 볼이 오늘따라 왜 이렇게 눈이 가는지 모르겠지만 깊이 생각하지 않고 바로 손을 뻗어 콕콕 누르고 살살 쓰다듬었다. 지민이 쳐냈지만 이내 자석같이 딸려오는 손은 결국 볼을 쟁취해내고 말았다.

 

 

 

 

 

***

 

 

"그러니까 내 말은 기왕 소문 난 썸 제대로 타 보라는 거지."

 

"...네? 뭘 타라고요?"

 

 

먹던 스무디를 내려놓은 지민이 벙 찐 표정으로 되묻자 호석이 멋쩍은 웃음을 지었다. 밥 먹자던 석진이 호석까지 불러선 카페로 들어갈 때부터 뭔가 이상하다 싶긴 했었다. 호석이 횡설수설 무어라 잔뜩 말을 늘어놓는걸 지민이 도통 못 알아 듣자 아이스아메리카노를 벌컥 들이켜고 내뱉은 결론이 저거였다. 썸을 타보라니. 도와주려는 마음으로 꺼낸 말 같긴 한데 왠지 지민은 찜찜한 기분이 들었다.

 

 

"야 그렇게 말하면 지민이가 놀라잖아."

 

"...어떻게 말해도 놀랄만한 내용인데요."

 

"잘 봐"

 

 

옆에서 관전하던 석진이 드디어 나섰다. 팔을 괴고는 지긋이 지민을 바라보는 눈이 여간 부담스러워서 지민은 흠칫 몸을 떨었다. 찜찜한 기분이 더 짙어졌다. 

 

 

"지민아 넌 커피도 잘 못 타고 면허 없어서 차도 못 타니까 썸을 타 보는 건 어때?"

 

 

푸하하 석진이 자신의 말에 먼저 웃음을 터뜨렸다. 아니 어디서 그런 말 같지도 않은 소리를...호석이 머리를 부여잡는데 옆에서 풋! 하고 지민의 웃음이 터졌다. 웃어? 놀란 호석이 고개를 돌려 다시 본 지민은 상체를 숙였다 폈다하며 웃고있었다. 그동안 많이 힘들었나...잠시 노파심이 일었다. 금세 다시 정색한 지민이 목을 가다듬자 석진이 지민의 입에 빨대를 물려주었다.

 

 

"놀라지 않게 개그를 섞어서 권유하는 형의 넓은 마음이 느껴지니?"

 

"형들이 정말 저 생각해 주는거 잘 알겠고 다 좋은데요....근데 왜 하필 얘랑.."

 

 

지민을 포함한 세 사람의 눈이 지민의 볼을 만지고 있는 태형에게 향했다. 지민은 한숨이 나왔다. 솔직히 말하자면 생각해 본 적 있는 스토리긴 했다. 다른 사람과 썸타는척 하고 과도하게 친해 보이게 행동하면 혹시 그것이 남준을 자극해서 일말의 진전이 생기지 않을까 하는 상상.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이제 겨우 생긴 단짝 친구를 썸남으로 둔갑시키라니. 안 그래도 썸 탄다는 소문이 사그라 들지 않아서 만회하고자 과도하게 사나이의 우정! 으리! 느낌으로 과한 모션을 취한 적도 많았다. 근데 썸을 타라니.

 

 

"진짜 썸 타라는 건 아니잖아."

 

"그래도 좀 그렇지 않아요?"

 

"아니 완전 괜찮아. 내가 그동안 옆에서 쭉 지켜봤는데 남준이 쟤 엄청 의식해"

 

 

석진이 턱짓으로 태형을 가리켰다. 태형은 여전히 지민의 볼만 만져대고 있을 뿐이었다. 다시 웃어봐 너 웃을 때 볼 좋단 말야. 하는 말과 함께. 이런 애를 남준이 의식한다니. 지민은 별로 그 말이 믿기지 않았다. 실상을 보면 태형과의 사이가 연인이나 썸 이라는 단어를 붙일 정도로 설레거나 다정한 사이만은 아니었다. 사실 처음 태형이 몸을 만져댈 때만 해도 남준이 그 모습을 보고 새로운 사랑이 생겼다고 오해 해서 영영 안돌아 올까봐 걱정했었는데 지금은 딱히 그런 걱정이 들지 않았다. 남준을 만날 땐 태형과 동행한 적도 없었고 학교까지 옮겨서 형 마음을 돌려놓을 거라고 선전포고한 마당에 그런 오해를 할 리가 없다고 생각했다. 아직 좋아하고 있다는 거 뻔히 알 텐데.

 

 

"아무튼 믿져야 본전이잖아. 이 방법 저 방법 가릴 처지가 아니라고"

 

"....막상 그런다고 해도 남준이 형 눈치 빨라서 다 알 텐데"

 

 

지민의 팩트폭력에 잠시 정적이 흘렀다. 하긴 눈치 좋고 촉이 좋은 남준은 금방 눈치채고도 남을 것 같긴 했다. 호석이 슬쩍 손을 들었다.

 

 

"그건 나도 동감한다."

 

"나도"

 

 

뒤이어 석진도 손을 들었다. 남준이 태형과 지민이 붙어 다니는 모습을 목격할 때 마다 눈에 띄게 심기가 불편해지길래 효과가 있지 않을까 하고 나름 야심 차게 꺼낸 작전이긴 했으나 자칫 들켰다간 어떤 결과가 나올지 장담할 수가 없다. 괜히 역효과가 날 수도 있고 깡그리 무시당할 지도 모른다. 하지만 만약 먹힌다면 가장 효과가 좋을 것 같은 방법이기도 했다. 석진이 들었던 손을 슬며시 내렸다.

 

 

"그래도 일단 해보자. 들켜도 혹시 아냐 니 노력이 가상해서 돌아올지도 모르지."

 

"제가 다시 남준이 형이랑 만났으면 좋겠어요?"

 

"난 그저 저번에 남준이 한번 도와줬으니까 이번엔 너를 도와주려는 것뿐이야."

 

"남준이 형 뭘 도와줬는데요?"

 

 

눈이 동그랗게 커진 지민을 보며 호석이 헛기침을 했다. 저 형은 괜한 소리를 해. CD도둑 일도 그렇고 남준의 행동도 그렇고 겨우 마음 잡은 지민에게 혼란을 줄 것 같아서 일단 쉬쉬하고 있던 터라 마음 한켠이 뜨끔했다.

 

 

"있어 그런 게."

 

"아 그리고 김태형."

 

"에?"

 

 

여전히 넋 놓고 지민의 볼이나 주물럭 대는 주제에 귀는 열어놓은 것인지 재깍 대답이 나왔다. 자다 일어난 사람도 아닌데 턱에 힘을 주지 않아서 발음이 다 새나간다.

 

 

"너도 작전을 위해 그런 동네 백수 같은 옷 그만 입고. 그동안 사 모은 옷은 다 어쨌어?"

 

"근데 듣자 하니 제 의사는 왜 안 물어 봐요? 전 얘랑 썸 탈 생각 없는데"

 

 

엥. 뾰로통한 태형의 대답에 석진과 호석은 뒤통수를 한 대 맞은 얼굴을 했다. 그러고 보니 그러네. 지민이가 거절할 것은 충분히 예상하고 왔는데 태형의 의사는 안중에도 없었다. 나름 좋은 작전인데 둘 다 거절을 해버렸으니 어떻게 한담. 석진이 고민하는 새 볼에서 거둬진 손이 이번엔 살랑이는 금빛 머리칼을 쓰다듬는 것을 보니 자신들이 왜 태형을 간과했는지 알 것 같기도 했다.

 

 

"그냥 지금처럼만 하면 될 것 같은 데 너는."

 

"지금처럼요? 내가 지금 얘랑 썸 타는 걸로 보여요?"

 

 

태형이 굉장히 어이없다는 듯한 표정을 지으며 돌아봤다. 어느새 금발을 떠난 태형의 손이 지민의 작은 손을 삼키는 것을 보며 세 사람은 한마음으로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부정의 의미는 아니고 할 말은 많은데 하지 않겠다는 표현이었다. 일단 지민의 의사가 먼저인 것 같아서 석진이 지민에게 물었다.

 

 

"그럼 한번 시험해 볼래?"

 

"시험이요?"

 

"김남준이 진짜 신경 쓰는지 안 쓰는지 보고 결정하면 되잖아"

 

 

별로 효과 없을 것 같은데...하고 말꼬리를 흐리던 지민을 결국 태형과 함께 카페에 두고 나왔다. 호석은 수업 때문에 자신의 학교로 돌아갔고 석진은 지민의 핸드폰으로 남준에게 할 말이 있으니 카페로 와 달라는 문자를 보내 놓은 후였다.  남준이 오는 것까지 본 다음에 슬쩍 빠질까 하다가 눈치 빠른 남준이 붙잡거나 추궁할까 봐 그 전에 먼저 학교에 돌아가 있기로 했다. 도서관에서 과제에 필요한 책을 한참 뒤적이다가 시계를 보니 한 시간이 훌쩍 지나 있었다. 이쯤 되면 만났겠지? 지민에게 카톡을 보내 볼까 말까 고민하며 학관에 도착했는데 멀리서 익숙한 인영이 휘적휘적 석진에게 다가왔다. 안녕하고 인사하는 사람은 다름 아닌 김남준이었다. 뭐야. 당황한 석진이 남준의 팔을 콱 붙잡았다.

 

 

"너 왜 여기 있어? 지민이는 만났어?"

 

"...지민이?"

 

"너 문자 못 봤어?"

 

 

못 봤을 리가 없다. 분명 알겠다는 답장까지 확인하고 나왔었다. 그럼 박지민은 지금까지 카페에서 뭐 하고 있는 거람. 석진이 허둥지둥 지민에게 전화를 걸었지만, 신호음만 지속될 뿐이었다. 그 옆에서 한참을 주머니부터 가방까지 뒤적거리던 남준이 허탈한 숨을 내쉬었다.

 

 

"아 나 핸드폰 잃어버렸어."

 

"뭐?"

 

 

튕겨 나갈 것 같은 석진의 목소리에 남준의 낯빛이 어두워졌다. 그럼 그 답장은 뭐야? 뒤이은 석진의 말을 들은 남준의 촉에 빨간 불이 들어왔다.

 

 

 

 

 

***

 

 

전에 지민은 호석에게 이런 질문을 들은 적이 있었다. 남준에게 새로운 연인이 생기면 어떻게 할 거냐고. 쿨하게 보내준다고 대답했지만, 막상 그런 일이 닥친다면 미련이 남아서 질척거리지 않을까 하는 걱정도 살짝 들었다. 그래도 만약에 그런 일이 생긴다면 마음을 다잡고 깔끔하게 정리하겠노라 마음먹었었다. 물론 어디까지나 남준이 지민에게서 완전히 마음이 떠났고 그래서 정리를 원할 때의 이야기다. 지금 둘의 마음은 여전했고 그래서 이렇게 붙잡으러 와 있는 것이었다. 성인이 되고 시간이 흐르면서 관계에 변화가 필요하지 않았나 하는 생각부터 별의 별 생각들이 머릿속에서 돌아가고 있었다. 남준도 애써 지민을 외면하지만, 머릿속이 복잡할 것이었다. 재회든 이별이든 간에 이 애매한 이 관계를 정리할 사람은 그 둘 뿐이었다. 그런데 애석하게도 제삼자가 선을 넘어올 줄은 꿈에도 몰랐다..

 

 

"그렇게 남준이가 좋으면 차라리 춤 관두고 저 처럼 공부를 하지 그랬어요."

 

"네?"

 

"솔직히 예체능이라는 게 특출난 성과 없이는 환영받는 직업 아니잖아요."

 

 

지민은 기가 막혀서 말이 나오지 않았다. 남준 대신 나타난 여자는 남준 학과 과대 여학생이었다. 어디서 난 건지 손에 남준의 핸드폰을 든 채로 나타난 여자는 카톡을 보고 참다못해 나오게 됐다고 했다. 그러더니 다짜고짜 더는 남준을 흔들지 말라고 엄포를 놓는 것이었다. 거기까지만 해도 충분히 주제넘은 행동이라 생각했는데 이젠 심지어 본인과 지민을 재기까지 하고 있다. 심각해진 공기에 태형도 지민을 만지던 손을 거두고 흘깃 여자를 쳐다봤다.

 

 

"제가 너무 말이 길었죠? 아무튼 남준이 맘은 제가 알아서 잘 추스를 테니까 지민 씨는 이제 그만.."

 

"그걸 왜 그쪽이 추슬러요?"

 

"네?"

 

 

모가 난 지민의 말투에 여자가 잠시 당황한 기색을 내비쳤다. 순둥한 표정으로 되묻는 것 외엔 말이 없던 지민을 우습게 보고있었던 것 같았다.

 

 

"형은 형이, 제 일은 제가 알아서 해요. 그쪽이 아니라."

 

"그럼 계속 김남준 만나겠다고?"

 

 

하, 정말 구질구질하네! 여자가 콧방귀를 뀌며 팔짱을 꼈다. 아까도 썩 예의 있진 않았지만 반 토막 까지 난 말투는 한 층 더 날이 섰다. 순간 아침드라마에 나오는 남자 주인공의 엄마가 네까짓 게 우리 애를 계속 만난다고? 하며 고약한 표정으로 물을 뿌리던 모습이 겹쳐 보였다. 물론 실제로 물을 뿌리거나 하는 일은 일어나지 않았지만 표독스러운 표정만큼은 견줄만했다.

 

 

"네 만날거에요. 아직 정리할게..."

 

 

"정리라고할게있어요? 순진한 거야 모자란 거야... 그쪽 김남준한테 뻥 차인 거라고! 애써 정리라고 포장해주니까 진짜 기회 있는 줄 알고 미련 못 버리는 모양인데 이쯤 해 두고 끝내요. 더 거지 같아지는 거 옆에서 보기 민망하니까."

 

 

"나와 너."

 

 

지민이 뭐라 대꾸하기도 전에 여자가 확 팔이 잡힌 채로 엉거주춤 일으켜졌다. 휙 끌어당기는 손의 주인은 남준이었다. 화가 난 표정으로 이내 성큼성큼 여자와 함께 카페 밖으로 나가버렸다.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라 태형과 지민 둘 다 얼어붙어 있었다. 특히 태형은 더욱 이 상황이 불편했다. 여자가 하는 말이 너무 심해서 대신 소리 칠 뻔한걸 몇 번이고 꾹 참았다. 후우 하고 긴 한숨을 내쉰 지민이 뒤로 몸을 푹 늘어뜨렸다. 나쁜 말 들을 들어서 그런지 속이 안 좋았다.

 

 

"나 화장실 좀"

 

 

털레털레 화장실 쪽으로 가는 지민을 보며 태형이 남은 스무디를 쭉 털어 마셨다. 무례한 일을 당해서 기분이 좋지 않겠지. 마음이 쓰이긴 하는데 어떤 위로를 건네야 할지 잘 모르겠다. 저번처럼 섣불리 맘 가는 대로 위로했다간 화를 낼지도 몰라. 만지면 가만 안 둔다던 말이 떠올라서 태형은 몸서리를 쳤다. 어물쩍 넘어가서 다시 만지고 있긴 한데 한 번 더 그 소리를 들으면 진짜로 못 만지게 될지도 모른다. 빈 컵에 빨대로 후후 바람을 불며 넋을 빼자 몽롱해진 시야로 춤추던 지민의 몸짓이 둥실 떠올랐다. 대회 망했다고 풀 죽어 있더니 바로 다음 날 그런 멋진 춤을 추고 말이야...태형은 할 수만 있으면 눈앞의 영상을 손에 쥐고 싶었다.

 

 

"지민이는?"

 

 

뚝 영상을 끊고 나타난 남준이 주변을 두리번거리며 태형에게 물었다. 하쟝시 가써여 빨대를 물고 답하느라 발음이 다 샌다. 되찾은 핸드폰의 버튼을 꾹 눌러 시간을 본 남준이 입술을 잘근 씹었다. 중요한 과제 발표가 있는데 시간이 얼마 없었다.

 

 

"저기 너."

 

"저요?"

 

"지민이랑 어떤 사이야?"

 

 

아. 남준은 저 질문을 뱉자마자 속으로 탄식했다. 그간 얼마나 신경이 쓰였으면 생각보다 말이 먼저 나갔을까. 돌리고 돌려서 석진한테 떠보듯 던졌어야 할 질문이었는데 이렇게 허망하게 흘러나와 버렸다. 눈을 몇 번 꿈뻑이더니 입에서 빨대를 슥 빼낸 태형은 별로 대수롭지 않은 표정이었다.

 

 

"아 저는 지민이 친구 김태형이라고 해요."

 

 

형은 김남준이죠? 다가온 손을 얼떨떨하게 잡은 남준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고 보니 서로 알고는 있지만, 통성명을 한 적은 없다. 아니 그보다 그러려고 꺼낸 질문이 아니잖아? 남준이 손을 휙 거두자 태형의 손이 허공에 붕 떴다.

 

 

"..이런 말 꺼내기 좀 조심스럽긴 한데, 학내에 소문이 자꾸 도는데 조심해야 하지 않을까?"

 

"조심이요?"

 

"단순한 친구 사이든 아니든 그런 소문이 난다는 게 좋은 일은 아니니까."

 

 

나름 조심스럽게 에둘러 말한다는 것이 자꾸만 돌직구로 나간다. 남준은 손에 식은땀이 다 났다. 어제 모의 면접 때도 이 정도로 긴장한 것 같진 않은데 자꾸만 이성보다 마음이 앞서는 것이 태형의 안일한 태도 때문인지 아니면 아직도 지민에 대한 마음이 남아서 그런 것인지 알 수 없었다. 뭔가를 한 참 생각하던 태형이 아~ 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지민이랑 다시 사귀려고요?"

 

"뭐? 갑자기 뭔 소리야"

 

"너무 신경 쓰시는 것 같아서요"

 

 

남준이 고개를 쭉 빼고 화장실 쪽을 기웃거렸다. 방심하던 차에 나타난 지민이 이런 얘기들을 들어 버린다면 달려들 것이 뻔했다. 다행히 지민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목소리를 줄인 남준이 태형 쪽으로 상체를 숙였다.

 

 

"지민이는...어떤 사이를 떠나서 일단 내가 잘되길 바라고 아끼는 동생이야. 걔의 미래가 걱정돼서 난.."

 

 

그건 걱정하실 필요 없어요. 태형이 남준의 말을 끊었다. 아끼는 동생을 걱정하는 건 자연스러운 것이 맞지만 왠지... 남준은 과하게 불안해 하고 있는 것 같았다. 물가에 내놓은 어린아이를 보는 것처럼. 단순한 걱정을 넘어서 믿지 못하는 것 같기도 했다. 이 사람은 나보다 지민가 춤추는 걸 더 많이 봤을 텐데... 재능이 뛰어나다고 한들 그렇게 사람 마음을 동요할 정도로 만드는 그 몸짓은 쉽게 이뤄낸 결과가 아닐 텐데 말이다. 지낸 시간이 남준보다 길지 않아서 몰랐던 약점이 있는 건 아닐까? 싶었지만 약점을 딛고 이겨내는 거야말로 진정한 용기라고 생각했다. 두렵고 무서운 마음이 있는 자가 만들어 낼 수 있는 것이 용기니까.

 

 

"지민이는 알아서 잘 할거거든요. 나는 잠깐 봐도 알겠는데 형은 아직도 모르겠어요?"

 

 

남준은 이를 꽉 다물었다. 그 사이로 허탈한 숨이 새 나왔다. 처음부터 끝까지 태평한 태형의 태도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같은 숨을 마시지만 다른 공간에 있는 것 같은 느낌을 주었다. 그래. 반박할 말들이 싹 사라져 버려서 허망하다. 난 수업이 있어서.. 다음에 보자 하고 나왔다. 사실인데 변명 같이 느껴지는 자신의 말투가 싫었다.

 

 

"헐.."

 

 

화장실 문 앞 벽면에 몸을 숨기고 있던 지민은 가슴께 올려둔 손을 꽉 눌렀다. 아까 자리에 돌아가려고 하던 차에 지민이랑 어떤 사이야? 하고 묻는 남준을 보자마자 저도 모르게 몸을 숨겼었다. 거리가 좀 있어서 정확하게 모든 대화를 듣지는 못했지만 대충 들리는 말들만 해도 남준은 질투를 하고 있는 것 같이 보였다. 썸남 작전 어쩌구 하며 주장하던 석진의 말들을 반신반의했었는데 시험해 보란 말을 들은 걸 잘 한 것 같았다. 물론 아까 그 여자와의 만남은 예상치 못한 일이라 불쾌했지만 그래도 지금 지민이 더 중요한 건 남준이었다. 형이 진짜로 신경 쓰고 있잖아? 솔직히 아까만 해도 이 작전은 실행하는 순간 들켜서 망한다에 기울어져 있었는데 실제로 남준을 보고 있자니 석진의 말을 듣고 싶어졌다. 믿져야 본전이라는 말. 어떻게 될지 모르지만 그래서 조금 두렵지만 그래도 해 보기 전엔 알 수 없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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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빛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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