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슈짐] Sing your secret

단편 2017. 2. 28. 12:15

 

 

공연장에는 음식물 반입 금진데요.”

 

뭐야

 

게다가 이렇게 흘리고 드시면 더 곤란하죠

 

반입 금지인 거 몰랐수다. 그리고 당연히 먹다 보면 흘릴 수도 있는..”

 

보통 그 정도는 상식 아닌가요? 그만 드시고 이리 주셨으면 하는데

 

아니 근데 너 날 언제 봤다고 쬐끄만게 훈계야?”

 

훈계가 아니라 제지를 하는 건데요

 

여기 관계자 불러. 어디 알바생 교육을 이따위로 시켜? 나랑 한번 해 보자 이거야?”

 

뭐 정 해보고 싶다면 한판 하죠.

 

이 새끼가!!!!!!!!!!”

 

 

공연 시작 3분 전. 늘 그래왔듯이 마이크가 또 말썽이다. 벌써 몇 년째 써 왔던 이 고물 마이크에서는 계속해서 치지직 하고 잡음이 일었다. 사전에 미리 점검해 놔라 그렇게 말했거늘 이번에도 대충 넘어간 것이 틀림없다. 응 알겠어. 하고 심드렁하게 대답하던 윤기의 모습이 생각나 석진은 절로 한숨이 나올 지경이었다. 옆에서 몇 번이고 마이크를 분해하던 남준을 저지하고 결국 마이크를 내던졌다. 일을 이렇게 만든 장본인이 책임을 져야 한다는 고약한 심산이 들어서였다.

 

 

야 민윤기!”

 

 

호출기에 대고 윤기 이름을 몇 번 더 불렀다. 귀찮더라도 공연 전엔 즉각 대답할 놈인데 오늘따라 반응이 없다. 몇 번을 더 반복해 윤기를 부르던 석진은 핸드폰을 집어 들었다. 익숙한 번호를 꾹꾹 누르려 하는데 동시에 제 손을 저지하는 손길에 고개를 드니 공연 안내를 맡은 알바생이 무슨 일인지 급한 표정으로 어버버 대고 있었다. 진정하고 똑바로 말해봐. 석진이 애써 다독이자, 부드러운 목소리 탓인지 금방 숨을 한번 고르고는 입을 열었다.

 

 

형 관객석으로 가보셔야 될 것 같아요..”

 

?”

 

윤기형 또 사고요

 

?”

 

 

아까까지만 해도 긴장과 설렘이 가득했던 석진의 표정을 밀치고 경악이라는 두 글자가 들어섰다. 평소 낮과 밤이 바뀐 생활을 하는 윤기의 별명은 올빼미였다. 오늘 객석을 담당하는 알바 한 명이 펑크를 내는 바람에 자고 있던 윤기가 그 일을 대신 맡게 되었다. 일이라기보단 그냥 잠도 깰 겸 관객석을 어슬렁대던 것이 전부였지만. 커다란 헤드폰을 쓰고 뒷짐까지 진 윤기의 모습은 알바생과는 영 거리가 멀어 보였다. 눈대중으로 대충 이곳저곳을 흘깃대며 돌아다니던 중 공연 규칙을 잘 몰랐던 한 관객이 아이스크림을 들고 들어오는 것을 발견했다. 처음엔 귀찮아서 못 본 척하고 지나가려 했지만, 하필 아이스크림이 윤기의 신발 위로 툭 떨어졌다. 새로 산 신발이 초콜릿색으로 물드는 것을 보던 윤기의 한쪽 입꼬리가 슬쩍 올라갔다. 맡은 임무가 있으니 최대한 화를 누르고 나름 서비스용 미소를 지은 것이었다. 문제는 반대쪽 입꼬리가 제자리를 고수하는 데에 있었지만. 자신을 비웃는다고 생각한 관객이 화가나 윤기의 헤드폰을 채가며 화를 냈고 결국 화를 누르기 힘들어진 윤기가 살벌한 눈빛으로 제지하다가 싸움으로까지 번져 버렸다.

 

벌써부터 선히 눈앞에 그려지는 윤기의 행태에 석진의 미간이 찌푸려졌다. 도움은 주지 못할망정 왜 사고를 치냐고. 차라리 가만히 잠을 자는 것이 나을 정도였다. 오죽하면 인자하기로 소문난 극장 단장님마저 윤기를 퇴출시킬까에 여러 차례 골치를 썩였다. 첫 오디션 때부터 쉬운 성격은 아니라고 생각했지만 이렇게 자주 사고를 칠 줄은 몰랐다.

 

 

야 민윤기!”

 

 

그럼에도 윤기를 내치지 못하는 것은 윤기의 작곡 실력 때문이었다. 무대에 절대로 서지 않겠다던 윤기가 단번에 소극장의 일원이 될 수 있었던 것도 그 때문이었다. 대표님은 물론이고 호락호락하지 않은 몇몇 단원들도 윤기의 실력에 대해선 극찬을 아끼지 않았다. 석진 또한 윤기의 곡을 좋아하는 사람 중 하나였다. 작업에 있어서는 게으르지 않기 때문에 만들어 놓은 멜로디와 곡들도 꽤 있었다. 문제는 그 많은 곡 중에서 쓸 수 있었던 곡은 딱 한 곡뿐이었다. 작업실에서 빛도 보지 못하고 쌓여 있는 곡들이 안타까웠다.

 

 

 

 

 

 

나한테 민윤기 객석 알바 시키자고 한 사람 누구야. 나와.”

 

 

결국, 책임을 떠안고 혼이 난 것은 최고참인 석진이었다. 대표를 도와 조연출 겸 단원들을 관리하고 있지만 그럴싸한 직책조차 없었다. 사고 친 당사자는 아마 지금 비품실 구석에서 잠을 자고 있을 것이었다. 공연이 끝난 무대를 정리하는 단원들을 지켜보던 석진은 비품실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한참 훈계를 하던 대표는 윤기에게 곡을 받아오라는 지시를 내렸다. 기존에 가지고 있는 곡들도 상당수인 데다가 시키지 않아도 곡 작업만큼은 게을리하지 않기 때문에 써라 마라 할 것도 없었지만, 문제는 그 곡을 공연에 올릴 수가 없다는 것이었다. 12세 관람가인 공연에 세상 한탄과 욕이 난무하는 곡을 올릴 수는 없으니.

 

 

그러니까 가사 수정만 해서 올리자 응?”

 

아 싫다니까.”

 

수정하기 싫으면 새로 쓰든가! 그리고 이번 곡은 제목부터가 욕이면 어쩌라는 거야

 

 

매트리스에 늘어져서 입만 뻐끔대던 윤기는 더 이상 대답하기 귀찮다는 듯 훠이훠이 손을 내저었다. 석진은 벌레가 된 기분이었다.

 

 

“...잠이 오냐? 아오, 진짜 일어나!!!”

 

 

미동도 없이 누워 있는 윤기를 내려 보던 석진이 비장한 표정으로 양손을 들어 올렸다. 천천히 내리다가 재빠르게 윤기의 겨드랑이와 옆구리를 마구 간지럽혔다. ! 몸부림치던 윤기가 벌떡 몸을 일으켜 앉고 나서야 손을 거뒀다.

 

 

씨발...내가 형을 보면 욕이 나와. 그런데 어떻게 욕을 안 써.”

 

나 말고 너 너에 대해서 쓰면 되잖아.”

 

내 인생도 욕이 들어가지. 왜냐면 형을 만났으니까

 

이 새끼가....”

 

봐 형도 나 보면 욕 나오지?”

 

 

말문이 막힌 석진이 마른세수를 했다. 별의별 방법을 다 써봤다. 대표님과 작당하고 몰래 가사를 고쳐 쓰다가 윤기에게 들켜 별의별 욕과 저작권법에 대한 설교를 들었었다. 어르고 달래기 작전으로 바꿔서 최대한 비위를 맞춰줬지만 귀찮으니 미리 다 거절할게. 하는 대답이 돌아왔다. 아니 내가 무슨 말을 할 줄 알고? 제대로 부탁하기 전부터 당한 거절에 석진은 모든 의욕이 사그라졌다. 계속 이런 식이라면 극단과 윤기 서로를 위해 그만두는 것이 낫지 않을까 하는 생각마저 들었다. 윤기의 곡은 좋지만, 그의 가사는 이곳에 어울리지 않는다. 맞지 않는다는 것을 본인도 알고 있을 텐데 이상하게도 윤기는 극단에 꼬박 출석하며 이곳에 있고 싶어 했다. 좀 솔직해지자면 석진도 계속 윤기와 함께하고 싶었다. 그 마음만큼은 단원들도 대표님도 같을 것이었다. 그래서 어떻게든 조금이라도 윤기의 마음을 더 열어 보고 싶었다.

 

 

 

 

 

***

 

지민도 한때 그런 때가 있었다. 남들과 다르게 뛰어나고 특별한 재능을 가지고 있지 않을까. 도전하고 부딪히다 보면 모두 이겨내고 나를 알아봐 주는 좋은 기획사를 만나 무대에 서는 날이 오지 않을까 하는 꿈을 가지고 있었다. 고등학교 시절 밴드 동아리를 하면서 상도 많이 탔었고 학원 선생님도 조금만 노력하면 대성할 타입이라는 칭찬도 아끼지 않았었다. 노래할 때가 가장 가슴 뛰고 행복해서 그거면 다 된다고 생각하던 시절이었다. 졸업하자마자 갑자기 기울어진 가세에 바로 취업 전선에 뛰어 들어야했다. 더 바빠지신 아버지와 몸이 약해진 어머니, 아직 학생인 동생을 위해 일단 꿈은 접어 두기로 했다. 쉬지 않고 알바와 여러 일을 전전하며 돈을 모았다. 3년의 세월이 순식간에 흘러갔다. 기울었던 가세도 어느 정도 괜찮아졌고 엄마도 건강을 되찾았다. 동생은 어엿한 대학생이 되어있었다. 그리고 스물둘이 된 지민의 꿈은 마음속 깊숙한 곳에 먼지 쌓인 채 흐려져 가고 있었다.

 

노래를 완전히 접은 것은 아니었다. 언제고 다시 시작할 수 있다고 막연하게 미뤄두고 있었다. 지금 하는 일도 적응하다 보니 편해져서 이대로 지내도 괜찮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잠깐 했었다.

 

 

난 니가 노래로 먹고 살 줄 알았는데

 

 

오랜만에 만난 친구가 저렇게 말했을 때 지민은 심장이 쿵 내려앉는 기분을 느꼈다. 꿈을 접은 동안에도 수많은 노래를 머금었었다. 막연하게 언젠가 무대에 설날을 생각했다. 미래의 나는 무대에 있을 거야. 하지만 그동안 오디션 프로그램을 절대 볼 수 없었다. 그토록 좋아하던 밴드 공연이나 콘서트도 갈 수 없었다. 마음이 뻥 뚫린 것처럼 허전했다. 바람조차 통하지 않는다. 마음속 고인 물이 흔들리긴 했지만 여기서 멈췄으면 또 그대로 잔잔하게 지나갔을지도 모르겠다. 그길로 친구의 손에 이끌려 오랜만에 소극장에 오게 되었다. 전엔 자주 공연을 보러 다녔었는데...반가우면서도 낯선 기분이 들었다. 공연 내내 마음을 졸이며 무대를 바라보았다. 점점 밀려오던 물들이 일렁인다. 그러고 세 번째 곡이 시작될 때였다. 벅차오르는 느낌이 대체 얼마 만인지 모르겠다. 코끝이 찡하고 눈물이 핑 돌았다. 마음속에 물이 거센 파도가 되어 덮쳐 흘렀다. 그러다가 문득 속에서 그런 외침이 들렸다. 나 지금 뭐 하고 있지? 나 왜 이러고 있지?

 

그리고 그 길로 지민은 일을 그만두었다. 꼬박 일 년을 연습과 오디션에 매진했다. 하지만 결과는 늘 낙방이었다. 그만둔 회사에선 지민을 회유했다. 지민씨가 노래 잘하는 건 알지만, 그 정도 실력은 흔해. 학원에서도 저보다 어리고 뛰어난 학생들을 보면 마음이 위축됐다. 특별한 재능을 믿던 어린 시절이 떠올랐다. 드라마 주인공 같은 인생만 존재하는 줄 알았는데 실상은 서브에도 못 미치는 엑스트라 인생인지 모른다.

 

그래서 지민은 접기로 했다. 그래도 이렇게 보내기엔 아쉬워서 마지막으로 딱 한 번 오디션을 보기로 결정했다. 단원 모집이라고 올라온 공고를 읽고 도착한 곳은 1년 전 친구의 손에 이끌려 갔던 소극장이었다. 지민이 오디션장에서 부른 곡은 아마도 그 극단의 밴드에서 만든 곡인 것 같았다. 1년전 파도가 치게 하던 세번째 곡. 아무리 인터넷을 찾아봐도 나오지 않았다. 하는 수 없이 악보도 반주도 없이 무반주로 불러야 했다. 목소리 끝이 계속 떨렸지만 두 눈을 꼭 감고 주먹을 꽉 부르쥐고 노래를 마쳤다. 연락을 준다는 말과 함께 그대로 집에 들어와 맥주 세 캔 정도를 비우고 잠이 들었다.

 

 

보통 오디션은 연락을 준다고 하고 연락이 없으면 아 떨어졌구나 하던 것이 다반사였다. 그런데 그날 아침은 달랐다. 끊이지 않고 맹렬한 기세로 울리는 핸드폰을 집어든 지민은 지금 이곳이 현실인지 꿈인지 분간이 가지 않았다.

 

- 박지민씨 맞으시죠? 여기 00소극장입니다. 지금 빨리 나와 주시겠어요?

 

“..? 어디요?”

 

마지막으로 오디션을 본 그 소극장에 덜컥 붙었다. 지금 빨리 나오라는 말이 좀 이상하긴 했지만, 이거저거 따질 처지가 아니었다. 지민은 재빨리 옷을 꿰입고 소극장을 향해 서둘러 걸음을 빨리했다.

 

 

도착하자마자 지민에게 주어진 것은 두 장의 악보였다. 허밍으로 된 데모를 들으며 악보에 쓰여 있는 가사를 대입해 보았다. 한번 들었을 뿐인데도 가슴이 세차게 뛸 정도로 노래가 좋았다. 가사를 붙여 부른 노래를 당장 들어보고 싶었다. 상기된 지민의 앞에 서 있던 석진이 웃으며 물었다.

 

 

마음에 들어요?”

 

, 완전....”

 

 

지민의 긍정적인 반응에 대표가 뭐라 중얼거리더니 옆쪽에 다른 방 안으로 지민을 보냈다. 곡의 원작자가 있는 방이고 지민을 뽑은 사람이라고 했다. 안으로 들어서자마자 지민은 일단 고개부터 꾸벅 숙여 인사했다. 안녕하세요. 고개를 들자 앞에 앉은 남자의 모습이 들어왔다. 반쯤 소파에 누워있는 것은 윤기였다. 며칠 잠을 못 잔 사람 마냥 피곤해 보이는 얼굴이었다. 말없이 침묵이 이어지자 지민이 다시 입을 열었다.

 

 

“...그 곡 원작자 시라고..”

 

“.....”

 

곡 완전 좋더라고요

 

 

합주실인 듯했다. 키보드 드럼을 비롯한 여러 악기가 즐비해 있었고 그 반대편에 덩그러니 놓인 소파가 이질적으로 느껴졌다.

 

 

당연히 그래야지. 너 주려고 쓴 건데.”

 

소파에서 몸을 뒤척거리던 윤기가 중얼거리듯 말했다. 지민은 순간 제 귀를 의심했다.

 

 

? 저요?”

 

같은 말 두 번시키지 마.”

 

 

어제까지만 해도 꿈을 접느니 마느냐 하며 희망찼던 과거를 회상하며 가슴 아린 시간을 보냈는데 하루 만에 상황이 뒤집혔다. 갑자기 쏟아지는 기회가 너무 달콤해서 정신을 차릴 수 없었다. 최면에라도 걸린 것 같았다.

 

 

진짜 이 곡 제가 불러도 돼요?”

 

, 대신에...”

 

 

윤기가 눈만 살짝 뜨고 지민을 응시했다.

 

 

이 곡 너 줄 테니까, 나랑 잘래?”

 

“...??”

 

 

놀람과 동시에 심장이 바닥으로 툭 꺼졌다. 그럼 그렇지. 어쩐지 행운이 너무도 쉽게 찾아온다고 생각했다. 잠시나마 특별한 기분에 사로잡혀 잊고 있었다. 왈칵 눈물이 차올랐다. 마지막이고 뭐고 간에 차라리 접을 걸 그랬다. 이런 식으로 농락당할 바에는 시작하지 말걸 그랬다. 한발 짝씩 뒷걸음질 쳤다. 점점 원하던 꿈과 멀어지고 있었다. 덩그러니 섬에 두고 뒤돌아서 그곳을 뛰쳐나왔다. 계속 있다간 숨이 막혀 죽을 것 같았다.

 

 

! 하고 닫힌 문을 본 윤기는 벙 찐 표정을 지었다. 장난이 좀 심했나? 그래도 바로 뛰쳐나갈 줄은 몰랐다. 그날 오디션 장에 윤기는 없었다. 듣고 싶지 않고 보고 싶지도 않았다. 그래서 헤드폰을 끼고 비품실에 누워서 음악을 듣고 있었다. 그러던 중 충전기를 헐겁게 끼운 탓인지 배터리가 나가버렸다. 헤드폰에서 더 이상 아무런 소리도 나오지 않았다. 그리고 그 너머로 들려오는 노래에 질끈 눈을 감았다. 보는 것도 듣는 것도 두려웠는데 생생하게 보이고 들려오기 시작했다. 되게 웃기고 감성적이라 지금 다시 생각해도 소름이 오소소 돋는데 딱 그 표현이 맞다. 심장이 뛰었다. 심장이 쿵쿵 뛰기 시작했다. 기다리던 것이 찾아왔다. 이건 잡아야 했다. 자신을 위해서도 극단을 위해서도 그리고 저 노래를 부르는 사람도 모두의 기회였다. 그렇다고는 하지만 아끼던 곡을 덜컥 줘 버리는 것이 좀 얄미워져서 살짝 장난 좀 친다는 것이 지민의 기분을 많이 상하게 한 듯했다. , 딱히 붙잡지 않아도 석진과 대표님이 알아서 잡아 둘 것이기 때문에 신경 쓰이지 않았다. 욕을 넣지 않고는 가사를 쓰지 않던 윤기가 드디어 욕은커녕 희망과 사랑에 가득 찬 노래를 썼으니 말이다.

 

다시 잠이나 자야지 하는 것도 잠시 다시 쾅! 소리를 내며 문이 열렸다. 당황한 석진을 뿌리치고 우다다 들어선 사람은 아까 뛰쳐나갔던 지민이었다. 의외의 상황에 윤기가 눈썹을 찌푸렸다. 그 앞으로 지민이 성큼성큼 다가섰다. 그리고 온 힘을 다해 윤기가 앉은 소파를 뒤로 벌러덩 밀어 버렸다. 그 바람에 바닥과 박치기를 한 윤기가 황당한 듯 잠시 말을 잃었다. 이내 살벌해진 눈빛으로 지민을 노려보았다. 날카로운 인상에 우르르 몰려서 구경 왔던 단원들이 흠칫 몸을 떨었지만 지민은 그런 것 따위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화장실에서 울분을 삭이다 도저히 참을 수가 없어서 다시 왔다. 이대로 순순히 끝내면 억울하지. 너무 억울했다. 뭘 그렇게 잘나서 남의 꿈을 가지고 노는 건지 화가 치밀었다.

 

 

사람 잘못 보셨어요.”

 

“...?”

 

...! 저 그런 사람 아니거든요? 남의 꿈 이용해서 그런 식으로!! 앞으로 그렇게 살지 마세요. 다신 내 눈에 띄지도 말고요. 한 번만 더 이런 헛짓거리 하면 내가 확 고소해버릴 거라구요..!”

 

 

고소.. 어쩌구 저쩌구... 흥분한 지민의 말이 윤기의 귀엔 제대로 들리지 않았다. 이용, 고소 등의 단어 몇 개만 겨우 알아들었다. 보이는 광경이 포근해서 바닥에 구른 자세 그대로 몸을 쭉 펴서 편한 자세를 취했다. 스르륵 눈이 감겼다. 아무래도 진짜 자야 할 것 같은데.

 

 

제 말 듣고 있어요? 이봐요!!!”

 

“...아 정말 쫑알쫑알 말 많네...”

 

 

윤기가 팍 인상을 쓰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지민에게 한 소리는 아니었다. 아까부터 뒤에서 구경하던 단원들의 쑥덕임이 거슬렸다. 지민의 팔을 콱 붙잡은 윤기가 털레털레 지민을 끌고 나왔다. 갑작스러운 행동에 벙 쪄서 아무 말 없이 끌려가던 지민이 겨우 어버버 입을 열었다.

 

 

“.., 지금 어디 가는 거예요!”

 

자러.”

 

??”

 

내가 좋은 장소를 알거든

 

아니 지금까지 뭘 들은...아 이거 놔요 싫다니까요!!!! 싫어요!”

 

 

그대로 몸을 뒤로 쭉 뻗으며 지민이 필사적으로 팔을 빼려 했다. 그러자 팔을 돌려 휙 꺾은 윤기가 지민의 반대쪽 손목마저 붙잡았다. 쎄쎄쎄라도 해야 할 것 같은 자세가 되었지만 둘의 표정에 장난기라곤 찾아볼 수 없었다.

 

 

가만히 좀 있어 힘 빠지니까.

 

싫다고! 이거 놔!!! 이 사기꾼!!! 이거 안 놓으면 신고할 거야!!”

 

그래 해. 신고도하고 고소도하고 다해.”

 

 

그렇게 끌려들어 온 곳은 암막 커튼이 쳐져 있는 비품실이었다. 가운데 덩그러니 놓인 매트리스가 보였다. 풀썩 먼저 앉은 윤기가 지민의 팔을 끌어당겨 앉혔다. 그리고 그대로 벌러덩 뒤로 눕자 지민의 몸도 딸려갔다. 으아악 비명을 지르며 오뚝이같이 벌떡 일어난 지민의 이마를 윤가가 꾹 눌러 다시 눕혔다. 지치지도 않는지 버둥대며 다시 일어나는 지민의 행동에 짜증이 난 윤기의 이마에 힘을 빡 주고 지민을 확 잡아끌어 안았다. 가만히 안 있으면 죽는다 너. 낮게 울리는 목소리에 흠칫한 지민의 몸이 목석처럼 굳었다. 하품을 늘어지게 한 윤기가 다시 입을 열었다.

 

 

, 노래 해봐.”

 

싫어요. 갈래요..”

 

 

아까보다 좀 주눅이 든 지민이 몸을 일으키려 바르작거리자 윤기가 한숨을 쉬었다. 정말이지 귀찮은 애다. 그대로 지민을 옆으로 밀고 지민의 위로 올라가 양어깨를 잡아 눌렀다. 고개를 들어 지민의 동공 지진을 나른한 표정으로 내려다보았다.

 

 

“...노래하기 싫으면 다른 거 할래?”

 

 

잠깐의 정적이 흘렀다. 다른 거? 엄한 상상이 눈앞에 펼쳐져서 지민은 헙 하고 제 입을 막았다. 내놓은 눈만 깜빡이다가 서서히 손을 내렸다. 지민의 입에서 허밍이 흘러나왔다. 예의 그 악보였다. 윤기가 지민에게 준다고 했던 그 노래. 말없이 지민의 목소리를 듣던 윤기는 다시금 하품을 늘어지게 하고는 다시 지민의 옆으로 풀썩 내려왔다. 그리고 다리를 들어 지민의 배 위에 올려놓고는 금방 쿨쿨 소리를 내며 잠이 들었다.

 

 

 

 

덩달아 깜빡 잠이 들었다. 지민이 다시 눈을 떴을 때 옆에서 내려다보고 있는 윤기의 얼굴이 보였다. 팔을 뒤로 뻗고 다리를 꼰 자세로 앉아 있었다. 놀란 지민이 재빠르게 몸을 일으키는데 윤기의 목소리가 들렸다.

 

 

“...색청 이라고 알아?”

 

색청? 뜬금없이 나온 말에 지민이 고개를 갸웃했다. 가만 생각해 보니 몇 번 들어 본 적이 있었다. 소리의 색깔이 보이는 현상 이랬던가.. 작게 고개를 주억거리자 윤기가 미소를 지었다.

 

 

난 소리가 눈에 보여. 아까 니가 한 허밍하고 오디션 때 노래도 다 봤어.”

 

 

소리의 색채는 말로 설명하기 애매했다. 뚜렷하게 나타난다기보단 어떨 땐 흐리고 파동처럼 흐트러질 때도 있고 때에 따라 달랐다. 가끔 아주 듣기 싫은 목소리는 보기에 좋지 않았다. 그래서 음악 편식도 심했고 좋아하는 것이 하필 음악이라 힘든 적도 많았다. 무엇보다 가장 힘든 것은 사람들과의 어울림이었다. 시끄러운 곳은 딱 질색이었다. 어지럽고 구토가 났다. 지금은 시끄러운 곳에 잘 가지 않거니와 나름대로 적응이 되어서 심하게 힘든 정도는 아니었지만, 아무튼 썩 좋은 증상이라고 생각하진 않았다. 이 소극장에 몸을 담그게 된 것은 이곳 사람들의 목소리는 하나같이 보기에 나쁘지 않았다는 것이 가장 큰 이유였다. 너울거리는 하늘색과 하얀색 파동이 좀 보기 좋았던 것 같기도 하다.

 

하지만 윤기는 살면서 본인이 색청이라는 사실을 가족 외에 누구에게도 털어놓은 적이 없었다. 그런데 지금 덜컥 만난 지 얼마 되지도 않은 지민에게 털어놓는 이유는 따로 있었다. 4대째 내려오는 이 색청을 완전히 낫게 할 수는 없어도 조금이나마 사그라들게 할 방법이 있었다. 더 이상 나쁜 소리에 시달리지 않아도 되고 음악적인 스펙트럼도 넓힐 수 있는 기회였다. 아버지에게 그 말을 처음 전해 들었던 18살 때부터 윤기는 7년을 꼬박 그 목소리를 찾고 있었다. 흩날리는 연한 분홍색의 벚꽃 같은 목소리다. 그냥 분홍색 눈송이처럼 보이기도 하고 진해지면 벚꽃이 날리는 것 같은 모양새였다. 포근한 느낌이라 자꾸만 나른해지는 목소리다. 아버지는 엄마에게서 그 목소리를 보았다고 했다. 그 목소리를 만나면 너의 비밀을 이야기해 줘라.

 

 

나는 니 노래가 좋아. 포근해서 자고 싶을 때 보면 딱 이야.”

 

“...정말로 소리가 보여요?”

 

분위기를 환기하려 던진 말이 무색하게 진지한 표정을 한 지민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비가 오는지 암막 커튼 뒤쪽 창에 빗방울이 부딪히는 소리가 났다. 통통 퍼지는 옅은 회색빛 비눗방울들을 보며 윤기가 다시 입을 열었다.

 

내 비밀은 우리 가족들 빼고 아무도 몰라. 너한테 처음으로 말한 거야.”

 

“...왜요?”

 

니 목소리에 반했으니까.”

 

지민이 느리게 눈을 감았다 떴다. 무언가를 보는 듯한 윤기의 눈동자를 쫓다가 그의 얼굴로 시선을 돌렸다. 그런 지민의 눈을 맞받아 본 윤기가 길지만 짧은 이야기를 다시 이었다. 너한테 준 곡은 내가 7년 동안고치고 고치며 만든 노래야. 언제 어디서 만나게 될지 알 수가 없어서 상상하고 또 상상하면서 고치고 고쳐 썼어. 처음엔 꼭 만나고 싶고 결의에 불탔지만, 시간이 갈수록 점점 막연해졌어. 색청을 가진 사람이 모두 같은 색을 보는 것은 아니니까 아버지의 도움도 받을 수 없었지. 뭐 딱히 받을 생각도 없었지만. 말했다시피 실제로 분홍색 소리는 본 적이 없었으니까. 시간이 지날 수록 점점 깊게 생각 안 하게 되더라고. 언젠간 만나겠지 하면서...그것 보다 내 살 궁리하기 더 바빴고. 그러다 정말 말도 안 되게 갑자기 어디서 꽃잎이 날아든 거야. 하나둘 흩날리는가 싶더니 확 몰아치기도 하고 다시 천천히 살랑거리는 거 보면서 바로 알겠더라. 아버지가 말한 게 이거구나. 막 벅차게 심장이 뛰어서 바로 대표한테 말했지.

 

 

그런데 왜 나한테 자자고 했어요?”

 

“농담이지 임마.”

 

 

니 목소리 들으면 잠 잘 올 것 같기도 했고. 암막 커튼도 귀를 꽉 덮는 헤드폰 없이도 저 목소리만 있으면 잘 수 있을 것 같기도 하다. 매트리스 위쪽에 있던 악보를 집어 든 윤기가 지민에게 천천히 내밀었다.

 

 

할래, 말래?”

 

찾던 사람이 정말 내가 맞아요?”

 

 

팔랑팔랑 날아드는 분홍색 꽃잎을 보며 윤기는 고개를 끄덕였다. 궁금하면 확인해 보든가. 윤기의 퉁명스런 말투에 지민이 작게 하하 웃었다. 노란색의 솜뭉치 같은 방울이 데구루루 굴러다녔다. 웃는 소리도 보기 좋구나 넌.

 

 

내가 특별한 사람이 된 기분이에요

 

 

불과 몇 시간 전까지만 해도 지민은 제 인생이 엑스트라 인생이라며 한탄하고 있었는데 정말 마법 같은 일이 일어나고 있었다. 나한테 있어서 특별한 사람이지. 윤기가 그 말은 속으로 삼키고 고개만 끄덕였다. 앞으로 더 특별해질지도. 악보를 마주 잡은 얼굴에서 폭신한 분홍색들이 일렁였다.

 

 

 

 

'단편' 카테고리의 다른 글

[진지] 어젯밤 이야기  (0) 2018.01.20
[뷔민] Look for a star  (1) 2017.07.23
[슈짐] Sing your secret (번외)  (0) 2017.03.12
[뷔민] 투닥투닥  (0) 2017.02.12
[조각] 뱀파이어 조각  (0) 2016.12.15
Posted by 빛달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