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준은 그 이후로 지민을 철저히 무시하는 중이었다. 지민을 포기한 것은 아니었다. 태형의 볼에 뽀뽀하던 장면은 자다가도 이불을 뻥 찰 정도로 싫었고 이가 으득 갈렸다. 지민을 보면 느껴지는 감정들이 다 싫었다. 좋아한다고 인정하고 고백하고 사귀면 좀 나아질까 했었는데 이미 물 건너간 지 오래고 덩그러니 남은 마음은 물이 끓다 증발해버려서 타 버린 냄비 바닥 같았다.

 

지민은 모르고 있겠지만 사실 은준은 지민을 처음 봤을 때부터 호감이 있었다. 지민을 처음 본 곳은 실기고사 시험장이었다. 실기 도우미였던 은준은 mr담당이었다. 응시생 수가 꽤 많은 데다 시험장 분위기에 덩달아 긴장하게 되어서 기억에 남는 사람은 손에 꼽을 정도로 적었다. 특출나게 예쁘거나 춤을 잘 추던 학생 몇몇이 그러했다. 그중에서도 지민은 유독 기억에 콱 박혀 들어왔다. 첫 등장 때 금발 머리가 눈에 띄긴 했지만, 동요할 정도는 아니었다. 우리 학교에 지원한 이유가 무엇인가요? 교수님의 질문에 지민이 호기롭게 내놓은 대답은 모두를 어이없게 했다. 좋아하는 사람이 이 학교에 다녀서요. 면접에 대한 답을 열심히 준비해온 학생들도 있었고 대충 대답하는 학생들도 있었지만, 어디에서도 저런 대답을 들어 본 적은 없었다. 그런 한심한 이유라니 넌 탈락이다. 은준은 속으로 혀를 차며 음악을 재생시켰다.

 

그리고 그때부터였다. 아마도 그때부터 일 것이다. 지민을 좋아하게 된 것은. 첫눈에 반한다는 것을 처음으로 겪었다. 기술적으로도 손색없는 몸짓이긴 한데 그런 학생들은 지민 말고도 많았다. 그런 것보다 지민의 춤은 사람의 마음을 끌고 동요시키는 그런 힘을 가지고 있었다. 홀리듯 멍하게 바라보다가 침까지 흘렸었다. 다시 만날 수 있겠다고 확신했다. 실제로 그 후 지민이 신입생으로 학교에 입학했고 선후배 사이로 다시 만날 수 있었다.

 

하지만 잘 해주고 싶고 친해지고 싶던 마음과 달리 모두의 주목을 받는 지민에게 묘한 질투심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3년 동안 학교에서 대회 출전 한번 제대로 해 본 적이 없었는데 고작 1학년인 지민은 초장부터 대표로 출전했다. 많은 학생의 부러움과 시기를 샀고 은준 또한 지민이 미웠다. 지민이 아름다운 꽃이라면 꺾어서 제 발밑에 두고 싶었다. 그래서 솔선수범 나서서 씨디도 훔치고 안 좋은 소문도 퍼뜨리고 대놓고 지민을 힐난했었다. 하지만 그럴수록 시들긴커녕 여전히 생생하다. 비 온 뒤에 땅이 굳듯 오히려 단단해진 것 같았다. 너무 미운데 너무 좋은 이 뒤틀린 심사를 어떻게 해야 할지 답답했다. 괴롭히고 내리찍고 싶은데 가지고 싶기도 했다.

 

이 모든 마음을 좋아한다는 맘으로 종지부를 찍고 고백을 하면 좀 나아질까 했었다. 연인으로 발전한다면 미운 마음은 사라지고 좋은 마음으로 다잡을 수 있지 않을까 하는 마음에 고백했지만 차였다. 잊고 있었다. 좋아하는 사람 때문에 왔다던 그 말을. 황홀한 춤에 빠져서 새까맣게 잊고 있었다. 그러다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황당한 대답을 하고도 그런 황홀한 춤을 추는 것은, 아무리 짓밟아도 생생하게 일어나 춤을 추는 것은 좋아한다는 그 사람 때문이 아닐까.

 

 

그래, 니 원동력이 사랑이라면

 

 

지민이 태형의 볼에 뽀뽀하던 장면이 다시금 머릿속에 재생되었다. 손이 부들부들 떨렸다. 그게 얼마나 쉽게 꺼질 수 있는지 알려줄게. 손에 들린 그 촛불 같은 사랑을 내가 꺼뜨릴 거야.

 

 

 

 

 

**

 

태형은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하품을 하며 지민의 얼굴을 떠올렸다. 그리고 씻을 때도 밥을 먹을 때도 내내 지민을 생각했다. 지금 지민이는 밥을 먹었을까? 아니면 춤 연습하고 있나? 아침이니까 얼굴 부어 있겠지? 귀여워. 잠긴 목소리도 듣고 싶다. 웃음소리도 귀여운데 그리고 춤도 계속 보고 싶을 만큼 잘 추고...밑도 끝도 없이 이어지는 지민에 대한 생각들은 멈출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정말 시도 때도 없고 한번 시작하면 좀처럼 멈춰지지 않았다. 요샌 지민을 보면서도 지민을 생각했다. 전엔 이 정도 까진 아니었는데 아예 머릿속을 지배당한 기분이었다. 좋아한다는 것을 제대로 알아차리고 나서 그게 다인 줄 알았다. 딱히 바라는 것도 없었다. 그냥 매일 보는 것만 해도 좋았다. 더 이상 내가 왜 이럴까? 할 필요도 없고 쓸데없이 마음 상하거나 도망칠 일은 없겠지. 그런데 아니었다. 끝인 줄 알았는데 점점 더 커지고 있었다. 좋아! 좋아! 너무 좋아서 보고 싶다. 밤이 너무 길다. 창밖의 달은 지민이를 닮아서 더 보고 싶어진다. 옆에 있어도 보고 싶고 안 보일 땐 달려가고 싶고 여전히 눈을 감으면 더 찬란하게 반짝여서 가슴이 벅찼다. 누구라도 붙잡고 자랑하고 싶었다. 나 지민이 좋아한다? 그래서 베개를 붙잡고 말해봤다. 나 박지민 너무 좋아. 학교 가는 길 내내 머릿속에 둥둥 달빛이 떠 있었다. 지금은 낮인데? 눈을 감았다. 아무래도 너무 보고 싶어서 전화를 해야 할 것 같았다. 핸드폰을 꺼내려 눈을 떴다. 그러자 거짓말처럼 멀리 동그란 뒤통수가 보였다. 마법 같은 일이 일어난 것 같아서 심장이 쿵쿵 뛰었다. 보고 싶다고 생각했는데 눈앞에 딱 나타나다니. 너무 좋아. 참을 수 없을 것 같다. 태형은 달리기 시작했다.바라는 건 없는데 해 주고 싶은 것들이 너무 많았다.

 

...!.......지민아!”

 

 

지민은 누군가 부르는 소리에 뒤를 돌아보았다. 멀리서부터 지민을 부르며 헐레벌떡 뛰어오는 태형이 보였다. 다른 때처럼 웃는 얼굴이 아닌 다급해 보이는 표정이었다. 무슨 일이 있나? 놀란 지민이 태형 쪽으로 걸음을 빨리했다.

 

 

왜 그래? 무슨 일 있어?”

 

 

바짝 마주하고서야 멈춰 선 태형이 지민의 어깨를 짚고 고개를 숙여 숨을 몰아쉬었다. 삐죽 나온 혀 때문에 헐떡이는 강아지같이 보였다. 얼마나 뛴 건지 좀처럼 숨을 진정시키지 못한다. 대체 무슨 일 때문에 이렇게 다급하게 뛰어온 건지 지민은 걱정이 들었다. 천천히 등을 두드려 주자 심호흡을 하던 태형이 별안간 번쩍 고개를 들었다.

 

 

지민아!”

 

?”

 

지민아 너무너무 좋아해

 

?”

 

 

턱을 들고 네모 모양으로 웃는 입을 보며 지민이 헛웃음을 내뱉었다. 방금 들었던 걱정스러운 마음들이 송두리째 휭 날아가 버렸다. 정작 그렇게 만든 당사자는 참 싱그럽게도 웃으며 천진난만하게 입을 열었다.

 

 

보고 싶고 또 좋아한다고 너무 말하고 싶어서 뛰어왔어.”

 

그게 무슨 소리야 또...”

 

와 내가 말하면서도 이거 진짜 웃긴데, 좋아해 라는 마음이 너무 커져서 말 안하면 터질 것 같아서 어쩔 수 없었다!”

 

 

칭찬을 바라는 건지, 자랑이라도 하는 건지 끝이 올라간 말투에 표정까지 뿌듯해 보였다. 지민은 할 말을 잃어서 그저 웃는 태형의 얼굴을 빤히 바라보고 있었다. 태형이 지민의 어깨에서 거둔 손을 제 가슴에 꾹 대고 눌렀다.

 

 

근데 말 해도 터질 것 같네

 

 

허허 웃는다.

 

 

나 니가 너무 좋아. 진짜 너무 많이 큰일 났어

 

 

말했다. 태형은 자꾸만 웃음이 났다. 말하지 않으려고 했는데 말해버렸다. 고백이라고 하기엔 조금 부족한 느낌이었다. 그냥 순간적으로 참을 수가 없었다. 마음속에 있던 꽃봉오리가 갑자기 툭 하고 피어나 버렸다. 갑작스럽지만 자연스러워서 깊이 고민할 것도 없었다. 딱히 바라는 것도 없고 그냥 얼굴 보니까 자연스럽게 술술 나와 버렸다. 부끄럽진 않은데 여전히 심장이 터질 것 같았다. 꽃송이가 잔뜩 생겨 난 것 같다.

 

 

...”

 

?”

 

수업 늦겠다.”

 

 

뭔가 기대하고 던진 말은 아니긴 한데 좋아한다는 말을 들은 지민의 반응은 너무 싱거웠다. 멍한 표정을 짓더니 수업에 늦었다며 몇 발짝 뒷걸음을 치더니 후다닥 먼저 뛰어갔다. 아니야. 지민은 뛰면서 중얼거렸다. 아닐 거야. 그런 의미가 아닐 거야.

 

 

똑바로 보고 다녀야지.”

 

 

중얼대며 빠르게 걷다가 강의실 앞에서 누군가와 부딪혔다. 목소리만 들어도 그게 은준임을 알 수 있었다. 지민은 빠르게 고개를 숙여 사과했다. 죄송합니다. 그러자 은준이 지민의 어깨를 툭툭 털어주며 웃었다. 요새 인사조차 받아주지 않고 무시를 해서 화가 난 줄 알았는데 뭐 때문인지 오늘은 한결 편안한 표정이었다.

 

 

이번 학기 마지막 대회 내가 나가게 됐어.”

 

, 정말요? 축하드려요

 

정말로 축하해?”

 

 

돌연 굳은 얼굴을 한 은준이 지민에게 물었다. 지민은 그 의중을 파악할 수가 없었다. 얼마 전에 받은 고백도 그랬고 석진에게 들은 씨디 사건도 그랬고 지금 상황도 마찬가지다. 대체 왜 이러냐고 물어봐도 돌아올 대답 또한 이해할 수 없을 것 같았다. 당황한 표정으로 눈을 깜빡이는 지민을 보던 은준이 피식 바람 빠지는 소리를 내며 지민을 툭 쳤다. 농담인데 뭘 그래. 하는 눈이 다시 웃고 있었다.

 

 

그래서 말인데, 이따가 나 연습하는 것 좀 봐 줄래?”

 

? 제가요?”

 

. 너 춤 잘 추잖아. 의상 고르는 것도 좀 봐주라

 

 

의외의 칭찬에 지민이 멋쩍은 듯 턱밑을 긁적였다. 지민 또한 동아리에서 나갈 대회 연습 때문에 시간이 넉넉하지 않았다. 그런 고민을 캐치한 은준이 지민을 회유했다.

 

 

잠깐이면 돼. 오래 안 걸려

 

 

이번에 처음 대회에 선발 된 만큼 은준은 많은 것들이 신경 쓰일 것이었다. 그래서 후배인 나한테 이렇게까지 부탁하는 것일지 몰라... 지민은 입술을 꾹 깨물었다. 대회를 망쳐 놓고는 자신의 대회를 도와 달라는 것이 참 염치없어 보이면서도 어쩌면 그만큼 절박한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알겠어요. 작게 주억거리는 지민을 보며 은준은 미소를 지었다.

 

 

 

 

 

**

 

 

안 돼.”

 

 

석진은 손바닥까지 펼쳐 보이며 단호한 태도로 말했다. 그걸로 모자랐는지 의자에서 벌떡 몸을 일으켜 앞에 있는 지민과 태형의 이마를 나란히 콩콩 때렸다.

 

 

너도 안 되고 너도 안 돼!”

 

"아 왜 때려요!”

 

 

발끈한 태형이 벌떡 일어나 대들자 석진이 주먹을 치켜들며 눈을 부릅떴다. 한 대 더 맞고 싶냐는 의미였다. 바로 알아들은 태형이 꼬리를 내리고 자리에 앉았다. . 형이면 다야.

 

 

난 정말 간섭하기 싫은데 니네가 자꾸 나한테 주절주절 다 털어 놓잖아 사람 신경 쓰이게!”

 

그거야 형이 이것저것 물어보니까...”

 

아무튼 난 반대야. 넌 배알도 없어? 때려도 시원찮을 판에 지금 뭘 도와준다는 거야?”

 

 

석진의 목소리는 화가 나 잔뜩 흥분해 있었지만, 얼굴엔 걱정이 한가득 어려 있었다. 수업 끝나고 뭐하냐는 물음에 지민의 입에서 은준을 도와주기로 한 얘기가 나오자마자 석진은 제 귀를 의심했다. 걔 때문에 그렇게 고생해 놓고 복수는커녕 도와준다는 말이 나올 줄이야. 곱빼기로 시킨 고기덮밥이 한가득 남아 있었지만 절로 숟가락이 내려갔다.

 

 

그냥 잠깐 춤만 봐 주는 건데요 뭐.”

 

잠깐이고 뭐고 안 돼. 그리고 너

 

 

이번엔 석진의 눈이 태형에게로 돌아갔다. 너도 안돼. 꿀꺽꿀꺽 마시던 물을 내려놓은 태형이 눈꼬리를 축 내리고 입술을 비쭉 내밀었다.

 

 

내가 좋다는데 왜 안돼요

 

 

지민이 은준 이야기를 하기 전, 그러니까 석진이 수업 끝나고 뭐하냐는 질문을 한 데에는 이유가 있었다. 뭔가 평소와 달리 태형을 대하는 지민의 태도가 어색해 보였다. 눈도 못 마주치고 밥만 깨작이고 있었다. 그 옆에서 태형은 밥을 먹다 말고 뚫어지게 지민을 바라보고 있었는데 새삼스럽지 않은 행동이라 그러려니 했다. 감탄사처럼 흘러나온 말을 듣기 전엔. 아 나 얘 진짜 좋아하나 봐. 댕그랑 지민이 숟가락을 놓쳤다. 짧은 정적이 흘렀다. 이 이상한 기류를 석진은 바로 알아챘다. 혹시나 했던 일이 실제로 일어난 모양이었다. 저기서 아차 하면 폴인럽 하겠네! 지민에게 자꾸만 꽂히는 태형을 보면서 장난 반 진담 반 중얼대던 것이 실제로 일어난 것이다. 말이 씨가 된다더니... 밥을 먹으며 할 얘기는 아닌 것 같아서 수업이 끝나고 얘기 좀 들어보려 했다. 그래서 수업 끝나고 뭐하냐고 물었더니 이번엔 박지민이 레프트 훅을 날렸다. 은준 선배 대회 연습을 봐주기로 했다는 기가 찬 내용이었다.

 

 

암튼 넌 안 돼. 너 같은 바보한테 지민이 못 보내.”

 

바보라니! 그리고 형 것도 아니면서 뭘 보내요?”

 

조용히 해. 그리고 넌 절대로 도와주러 가지마.”

 

 

이 씨! 눈썹을 찡그리며 달려드는 태형의 얼굴을 쭉 밀며 석진이 지민에게 단언했다. 난 김 씨거든 하는 사족과 함께. 아무래도 수업 끝나고 지민을 찾아가서 감시라도 해야겠다는 생각을 하는데 핸드폰이 윙 하고 울렸다. 남준에게 온 문자였다. 한잔하자는 내용이었다. 좀처럼 술을 잘 마시지 않는 남준이 이런 문자를 보냈다는 건 꽤 큰 고민이 있는 것이 분명했다. 어쩔 수 없이 감시 대신 지민에게 몇 번이고 엄포를 놓는 것으로 대신했다. 끼니를 거르는 법 없던 석진이 밥을 남기면서까지 말린 것이 마음에 걸리긴 했으나 지민은 수업이 끝나자마자 연습실 앞을 기웃거렸다. 석진형 말대로 가지 말까? 하고 잠시 망설였지만 이내 부탁하던 은준의 얼굴이 떠올라 문을 밀고 안으로 들어갔다.

 

 

왔어?”

 

안녕하세요.”

 

 

은준이 반갑게 지민을 맞아 주었다. 어둑한 연습실 한쪽엔 작은 피아노가 있었고 반대쪽엔 조명 두 개가 나란히 서 있었다. 은준은 조명 바로 앞쪽에서 몸을 풀고 있었다. 막상 은준과 단둘이 한 공간에 있으니 어색함이 물처럼 밀려왔다. 문 옆쪽에 가방을 내려놓는데 거울 속 은준과 눈이 마주쳤다.

 

 

지민아 핸드폰 좀 빌려 줄래?” 

 

핸드폰이요?”

 

아 반주 틀어야 되는데, 내건 배터리가 다 돼서.”

 

 

은준의 말에 지민은 별 의심 없이 쭈뼛쭈뼛 다가가 핸드폰을 내주었다. 음악 검색 좀 할게. 그렇게 말해놓고 은준은 연락처에서 태형의 번호를 찾았다. 무용과 연습실로 와 달라는 문자를 보낸 후 바로 발신함과 최근 기록을 삭제했다. 그 후 유튜브에 들어가 곡명을 검색하고 있는데 태형에게서 곧 가겠다는 답장이 왔다. 수신함과 최근 기록을 지우고 바로 노래를 틀었다. 준비자세를 취하고 바로 동작을 이어가자 뒤쪽 벽면에 앉아 있던 지민이 또랑또랑한 눈으로 올려다보기 시작했다. 조명 때문에 그늘져 있지만, 눈빛만은 또렷했다. 음악이 중간쯤 흘렀을 때였다. 은준은 별안간 악 소리를 내며 자리에 주저앉았다. 화들짝 놀란 지민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왜요? 다치셨어요?”

 

, 발목 삔 것 같아....”

 

 

발목을 주무르며 은준이 미간을 찌푸렸다. 실제로 삔 건 아니었지만 그래 보이기 위해서 눈물까지 살짝 매달았다. 놀란 지민이 어쩔 줄 몰라 하자 은준이 손짓했다.

 

 

와서 좀 주물러 줄래? 이런 건 바로바로 풀어줘야 해서...”

 

“..? !”

 

 

은준이 바짓단을 살짝 걷어 올리자 지민이 가까이 다가가 앉았다. 발목을 감싸 쥔 손은 생각보다 작았다. 나름 힘을 꾹 주는데 꼼지락대는 손이 간지러워서 웃음이 날 것 같았다. 하지만 은준은 애써 앓는 소리를 내며 꾹 참았다. 이상한 일이다. 간질거리는 게 꼭 좋다가도 한편으로는 너무 싫다. 조명에 비춰 반짝이는 뒷모습 보자 가두고 싶었다. 작게 만들어서 손바닥으로 꽉 덮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지민아!”

 

?”

 

 

연습실 문이 열리고 태형이 안으로 들어섰다. 찌가 움직이자 기다렸다는 듯 낚아채는 낚시꾼처럼 은준은 재빠른 몸짓으로 지민의 팔을 확 잡고 제 쪽으로 끌었다. 그러자 은준의 위로 엎어진 지민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생각해 뒀던 시나리오대로라면 지민과 입을 맞추고 있고 그 모습을 태형이 보게 되는 것이었는데 안타깝게도 지민의 고개가 옆으로 틀어져 있었다. 태형 쪽에서 보기에 오해할 수 있도록 각도라도 그럴싸하게 맞추고 있는데 가까이 다가오는 태형의 발걸음 소리가 들렸다. 지민이 몸을 일으키려 하자 은준이 팔힘으로 꽉 내리눌렀다. 당황한 지민이 은준의 어깨를 콱 깨물었다. 비명을 지른 은준이 반사적으로 지민을 세게 밀쳤다. 데구루루 구르던 몸이 조명 기둥에 쿵 부딪혔다. 뒤이어 휘청거리던 조명이 그대로 쓰러져 내렸다.

 

사고회로가 정지한 은준은 눈을 꽉 감았고 지민은 어지러워서 정신을 차릴 새가 없었다. ! 하는 소리가 났다. 짧은 침묵이 흐르고 지민이 살짝 눈을 뜨자 바로 코앞에 태형이 있었다. 얼굴이 한가득 눈에 들어왔다. 반사적으로 뛰어든 태형의 뒤통수를 가격하고 반대편으로 넘어간 조명에서 유리 깨지는 소리가 났고 쓰러지면서 전선이 잘못된 건지 스위치에서 불꽃이 일었다. 놀란 지민이 태형을 일으켰다. 파지직 소리가 나다가 훅 꺼졌다. 연기 냄새가 코를 자극했다. 은준이 재빨리 플러그를 빼버렸다. 세 사람의 거친 숨소리만 연습실 안을 울렸다.

 

 

너 괜찮아?”

 

괜찮지 그럼

 

 

겨우 정신을 주워 담은 지민이 이리저리 살피며 묻자 태형이 어깨를 으쓱하며 답했다. 그와 동시에 머리에서 핏방울 한줄기가 주르륵 흘러내렸다. 깜짝 놀란 지민은 입도 뻥긋 못하고 숨을 헉 집어삼켰다. 덜덜 떨리는 손으로 태형의 피를 닦아냈다. 손을 타고 흘러내리는 피를 본 태형은 괜찮다고 애써 웃었다. 그러다 몰아치는 현기증에 아...! 하는 외마디 비명과 함께 그대로 눈을 감고 풀썩 쓰러졌다.

 

 

 

생각보다 심각한 상처는 아니었다. 뒤통수 쪽엔 혹이 났고, 이마 쪽은 파편이 튀면서 살짝 찢긴 상처였다. 병원에서 소독을 하고 거즈를 한 태형은 눈을 뜨자마자 배고파...하고 칭얼거렸다. 심각한 상처가 아니라는 의사의 소견을 듣고 지민은 어느 정도 마음을 가라앉혔지만, 막상 태형이 눈을 뜨지 않아서 얼마나 초조했는지 모른다. 걱정을 한가득 달고 기다렸는데 눈을 뜨자마자 배고프다니. 그 말이 왜 이렇게 안심이 되면서도 울컥했는지 모를 일이다. 여러 가지 감정이 북받쳐서 눈물이 났다. 손을 꼭 잡고 말없이 눈물만 주룩주룩 흘리는 지민을 보며 태형이 손끝을 톡톡 쳤다.

 

 

왜 울고 그래 속상하게.”

 

그러는 넌 왜 다쳐? 간 떨어지게!”

 

? 나 걱정했어?”

 

 

그러면서 활짝 웃는다. 웃음이 나와? 지민은 태형을 한 대 치려다 손을 거뒀다. 다친 애를 차마 때릴 수도 없고. 따지고 보면 다칠 뻔했던 것을 구해준 은인이나 다름없다. 그래도 그렇지 하마터면 큰일 날 뻔했다.

 

거길 왜 뛰어들어 멍청아. 큰 사고라도 나면 어쩌려고

 

그냥 고맙다고 하면 되지 뭘 그래

 

 

태형이 손사래를 치며 웃었다. 그 태연한 언동에 지민이 잔소리를 입에 가득 머금었다가 도로 집어삼켰다. 작은 한숨이 터져 나왔다.

 

 

고마워.”

 

 

낮게 울리는 지민의 목소리가 태형의 마음을 간지럽힌다. 진지해진 분위기가 낯간지러워서 볼을 긁적였다.

 

 

 

 

**

 

석진이 도착했을 때 이미 남준은 취해있었다. 마구잡이로 삐져나온 머리칼과 흐트러진 옷매무새가 그걸 증명하는 듯했다. 가게에서 나오는 익숙한 이별 노래를 따라 흥얼거리고 있었다. 상태를 보아하니 얘기를 나누기는 힘들 것 같아서 술잔을 빼앗아 들었다. 허공에 붕 뜬 손이 낙엽처럼 쓸쓸한 모양새로 떨어져 내렸다. 석진의 우려와 달리 남준의 정신은 말짱했다. 아니 말짱한가? 남준은 눈을 한번 깜빡였다. 눈두덩이 뜨거웠다. 열이 나는 것도 우는 것도 아닌데 그랬다.

 

 

가자.”

 

보고 싶어

 

 

오늘 참 청력을 의심하게 되는 말을 많이 접하네. 석진은 남준의 팔을 잡아끌다 말고 핸드폰을 집어 들었다. 그동안은 지민에 대한 마음이 살짝만 삐져나와도 아닌 척하면서 정색하더니 웬일로 보고 싶다는 말을 다 할까.

 

 

박지민 보고 싶어? 불러줘?”

 

“...아니 부르지 마.”

 

 

테이블을 보니 안주라곤 기본으로 나오는 형형색색의 과자가 전부다. 집어 먹은 흔적이 없는 걸 보니 술만 들이켰나 보다. 어째 가면 갈수록 나아지기는커녕 힘들어 보인다. 이럴 거면 제발 그냥 다시 사귀라고! 제지하는 남준의 팔을 뿌리치고 지민에게 전화를 걸려 하자 다시 다가온 손이 핸드폰을 채갔다.

 

 

이리 내놔. 보고 싶다며 그럼 보면 되지 뭐가 문제야

 

“...내가 보러 갈 거야.”

 

 

? 석진이 되묻기도 전에 남준이 비틀대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아니 이럴 거면 난 왜 불렀냐고 작은 목소리로 투덜대자 그걸 들었는지 고개만 휙 돌린 남준이 입을 열었다.

 

 

나 미국 간다. 겨울에...”

 

아 그래? 얼마 동안 가는 건데?”

 

“...몰라. 아주 갈 수도 있고.”

 

아주 간다고?”

 

 

이렇게 갑자기? 섭섭한 마음이 들려는 찰나 남준이 작게 중얼거렸다. 가기 싫다. 목도리를 주섬주섬 주워 두르는 손이 느릿했다. 그럼 안가면 되잖아. 하는 석진의 말에 남준이 피식 웃었다. 그러니까 말이야. 단순히 지민 때문만은 아니다. 남준은 늘 가만히 있어도 불안했다. 현재를 즐길 여유 따윈 없었다. 그냥 혼자 있어도 불안하고 두려운데 주변의 기대와 질책이 더 옥죄였다. 어디로 가든 성공이 보장되어 있지는 않지만 멋대로 갔다가 아무것도 이루지 못할까 봐 두려웠다. 그거 봐 결국엔 그렇게 될 줄 알았어. 당사자가 아닌 주변인들의 말은 참 쉽다. 얼마 전 만난 선배가 말했다. 뭐든 기대를 하면 실망하기 마련이니까 처음부터 기대하지 말라고. 실패와 성공이 있으면 실패했을 때를 먼저 생각해야 한다고 했다. 그래야 실망도 덜 하고 대처도 빨리할 수 있지. 남준은 너무 불안해서 아무나 붙잡고 확인받고 싶었다. 이 길로 가면 괜찮은가요? 주변에선 말한다. 그래 너라면 딱 그길로 가야 성공할 수 있어. 그러니까 그 길로 가. 망설여지는 이유는 싫기 때문이었다. 싫어. 그 길로 가기 싫어. 근데 가지 않았다가 실패하면 어떡하지? 책임진 다는 것이 무섭다. 미래도 힘든데 지민까지 짊어질 엄두가 나지 않았다. 결국, 상처에 상처를 받고 헤어지겠지 우리는. 그러지 않으려고 끊어낸 건데 자꾸만 아른거리니까 놓기가 싫다.

 

취했으니 얼른 집에 가라며 석진이 잡아준 택시에 올라탔다. 중간에 목적지를 바꿔 말했다. 이상하다. 헤어질 때는 이런 기분이 아니었는데.... 그땐 아름다운 추억으로 남길 수 있을 것 같았다. 다시 학교에서 마주쳤을 때도 그럭저럭 버틸 만했다. 그런데 갑자기 미국으로 가게 된다고 생각하니까 싫어졌다. 실감이 났다. 이대로 가면 영영 이별이구나 하니까 싫었다. 바닥에 가라앉아 있던 무언가가 거대한 소용돌이를 만들어 냈다. 이젠 못 봐. 그래도 괜찮아? 모르겠다. 한숨을 쉬어도 답답한 게 가시지 않는다. 붙잡는다고 해도 책임질 수 없다. 그런데 못 보는 건 싫다. 끝이 나지 않는 질문과 대답을 하다 보니 지치고 두려웠다.

 

 

 

?”

 

 

태형을 데려다준 지민은 강당에 남아 연습을 하다가 늦은 밤이 되고서야 겨우 집에 왔다. 저녁을 제대로 먹지 못해서 편의점이라도 가려고 집을 나섰을 때였다. 벽에 기대 서 있는 커다란 인영이 보여서 놀란 것도 잠시 서서히 드러나는 얼굴을 보고 그대로 자리에 멈출 수밖에 없었다.

 

 

지민아...”

 

 

지민을 발견한 남준이 몸을 일으켰다. 한발 짝도 채 옮기지 못해 비틀대는 모습이 위태로워 보여서 지민은 재빠르게 남준 쪽으로 뛰어갔다. 뻥긋대던 입에서 더듬더듬 말이 흘러나왔다.

 

 

도망... 도망가자.”

 

?”

 

 

한 뼘을 남기고 자리에 선 지민을 보며 남준이 조금씩 곁으로 다가갔다. 다리가 풀려서 휘청하는 몸을 향해 지민이 손을 뻗었다. 쓰러지듯 지민의 품에 안긴 남준이 으으 하고 신음을 내자 술 냄새가 올라왔다. 손을 올려 지민의 뒤통수를 쓰다듬었다. 정전기로 일어난 머리카락에 손끝이 간질간질했다.

 

 

도망가자..”

 

“......”

 

나랑...가자. 지민아

 

 

지민아. 남준이 주머니 속에서 꾸깃꾸깃 접혀 있던 종이 뭉치를 꺼내 지민의 손에 쥐여 주었다. 펼쳐서 한 장씩 넘기던 지민은 이 상황이 더 혼란스러워졌다. 독일 미국 영국 등 세계 각국의 무용단과 대학 목록들이었다. 일단 남준을 떼어내고 어깨로 지탱해 보려는데 도통 떨어지질 않았다. 빤히 내려다보는 눈이 음울해 보여서 지민은 한숨을 쉬었다.

 

 

저번에도 말했지만 말 안하면 나 몰라요. 그래서 더 상처 받을지도 몰라요. 그러니까 제대로 설명을 해 주세요.”

 

“....나 미국 가.

 

 

취기 때문인지 대답이 쉽게 튀어나왔다. 근데 가기 싫어. 뒤이어 나온 말에 지민은 고개를 끄덕였다. 놀라는 기색 없이 담담했다. 솔직히 아주 놀라지 않은 건 아니지만, 그보다 속상함이 더 컸다.

 

 

그래서 나랑 도망가려구요?”

 

응"

 

이 중에 어디로 언제?”

 

 

지민이 종이를 하나씩 남준에게 보여주며 말했다. 잘 보이지 않는지 눈을 찡긋댄다. 일단 들어가서 얘기하자고 한 다음에 집 안으로 남준을 데려왔다. 풀썩하고 현관에서부터 주저앉는 것을 질질 끌어 침대 밑에 기대 앉혔다. 뭘 묻히고 온 건지 턱 쪽이 거뭇했다. 이리저리 삐져나온 머리칼을 정리해주며 지민이 한숨을 쉬었다.

 

 

형은 대체 뭐가 그렇게 항상 힘들어요...”

 

 

그러자 게슴츠레하게 눈을 뜬 남준이 검지를 들어 지민을 쿡 찍었다가 이내 방향을 돌려 자신도 쿡 찍었다. 너랑 내 사이가 힘들어. 말을 잇지 못하고 사레라도 들린 듯 갑자기 기침이 쏟아졌다. 허겁지겁 냉장고에서 물을 꺼내온 지민이 남준의 턱을 받치고 물병 입구를 입에 대 주었다. 몇 모금 마시고 헛기침을 한다.

 

 

정말로 내가 가자고 하면 도망 갈 거예요?”

 

이제 지쳤거든.”

 

 

남준이 팔을 모아서 고개를 묻었다. 지민이 잠시 입을 다물었다. 앞에 털썩 마주 앉아 남준의 어깨로 조심히 손을 올렸다. 오랜만에 만지는 거라서 어색했다. 가까웠다가 멀어졌다가 이제는 가깝고도 먼 사이가 되었다.

 

 

저는 안 갈래요.”

 

“...?”

 

도망가지 말라니까 같이 도망가자고 하면 어떡해요.”

 

 

상념을 한데로 뭉친 말이었는데. 천천히 갈 테니 도망가지 말아 달라는 그 말은 넘치는 감정과 생각을 뭉치고 뭉쳐서 던진 말이었다. 그런데 남준은 엉뚱한 곳에서 손을 내밀었다. 같이 도망가자.

 

 

내가 어떻게 그러자고해요. 아무리 형을 좋아해도.....”

 

 

남준과 헤어지던 날이 떠올랐다. 석진에게 술주정을 하며 남준을 만나러 갈 거라고 했던 날도 떠올랐다. 그래서 입시를 치르고 이곳에 왔다. 하지만 남준은 냉랭했다. 선배들의 텃세도 심했고 그래서 대회도 실격했었지만, 도저히 포기할 수가 없었다. 단순히 사랑을 쟁취하기 위해 달리는 것이 아니었다. 커 보이던 남준을 짓누르는 두려움이 제일 마음에 걸렸다. 두려움은 쉽게 안 깨진다. 그래도 두려움 속에서 피어나는 것이 용기니까. 보여주고 싶었다.

 

 

나는 맞서려고 온 거지 도망가려고 온 게 아니에요.”

 

 

고개를 든 남준이 지민을 바라봤다. 안개가 낀 것처럼 뿌옇게 보였다.

 

 

예전에 나는 형이 강하다고만 생각했었어요. 고작 한 살 차이면서 키도 훨씬 크고 행동도 어른스럽고 해서 쫓아가기 버겁고 그랬어요.”

 

 

전히 흐린 시야 때문에 남준이 미간을 구기자 눈가에도 주름이 생겼다.

 

 

그래서 형이 그런 이유로 나를 떠날 줄 몰랐어요. 그래서 처음엔 이해가 잘 안됐어요. 아름다운 이별이라니...미래를 위해서 헤어지자니 그런 말을 듣고 어떻게 미련이 안 남아요. 차라리 너 싫어졌어. 질렸어. 다른 사람 생겼어 이런 이유면 나도 접으려고 했을 텐데....여전히 사랑스럽다고 그러고....”

 

 

서랍에서 꺼내진 기억이 펼쳐졌다. 넌 정말 사랑스럽고 멋있고 여전히 그래. 그건 지금도 마찬가지였다. 먼저 도망쳤는데 붙잡고 말한다. 도망치지 말라고.

 

 

그래서 나는 이렇게 끝낼 수 없으니까. 형이 그러는 게 답답하니까. 그래서 그 마음 돌리고 맞서려고 여기 까지 온 거예요. 나는 도망치기 싫어요.”

 

 

지민은 남준의 양어깨를 꾹 잡았다 놓았다. 분명하게 마음을 전달하고 싶어서 한 행동이었다. 두려움은 없앨 수 없지만, 옆에서 손을 잡아 줄게요. 맞서는 모습을 보여 주고 싶어요. 괜찮아 괜찮아. 두려워도 괜찮아. 달래듯 토닥이는 지민의 손길을 받으며 남준이 아랫입술을 살짝 물었다 놓았다. 고개를 들자 가까이 붙어 앉은 지민이 어깨에 팔을 두른 채 마주 보고 있었다. 손을 들어 지민의 눈가에 고인 눈물을 닦아주었다. 닿은 볼이 말랑하다. 이러면 안 되는데. 손가락에 살짝 힘을 주자 지민의 눈이 조금 커졌다.

 

 

가기 싫어. 계속 보고 싶다.”

 

 

보고 싶었어 엄청. 지민은 어깨를 살짝 움츠렸다. 귓가에 태형의 목소리가 들리는 듯했다. 지금 앞에 있는 건 남준인데 보고 싶다는 말을 한 것도 남준의 목소린데 왜 그 바보같이 웃는 얼굴이 떠오르는 건지 모르겠다. 이러면 안 돼. 코끝이 시큰해져서 눈물이 났다. 엉뚱한 퍼즐 조각을 들고 있는 것 같은 기분이다. 남준이 반대쪽 손을 들어 지민의 눈물을 닦았다. 그리고 점점 가까이 고개를 내리자 지민의 얼굴에 그림자가 진다. 이러면 안 되는데. 오른손이 볼을 스쳐지나 지민의 목 뒤쪽을 감쌌다. 눈을 감고 차분히 입을 맞췄다. 내려앉은 입술이 뜨끈했다. 살짝 물다가 안쪽으로 파고들자 지민이 버거운 듯 입을 뻐끔대며 자꾸만 고개를 위로 들었다. 통통한 아랫입술을 살짝 핥고 떨어진 남준이 지민의 가슴에 이마를 기댔다.

 

 

정말 내가 다시 예전처럼 괜찮아 질 수 있을까?”

 

 

안개비가 스민 것 같은 눅눅한 목소리였다. 서서히 몸을 떼고 가지런히 내리뜬 눈을 마주하며 지민은 천천히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니요

 

 

지민의 대답을 들은 남준의 눈동자가 떨렸다. 괜찮지가 않아서 도망쳐왔어. 그런데 도망치고 나서도 괜찮지가 않다. 옥죄는 것들을 다 풀어헤치고 깨뜨리고 싶었다. 하지만 두려운 마음은 여전했다. 지민에게도 미안했고 부끄럽기까지 했다. 너를 위한다는 말로 도망쳤고 그런 주제에 미련을 놓지 못한다. 괜찮아지지 않아. 남준이 그렇게 속으로 되뇔 때 다시금 지민이 입을 열었다.

 

 

“...예전보다 훨씬 강하고 괜찮아 질 거예요. 많이 힘들었던 만큼

 

 

힘들었던 만큼 더 멋있어질 거예요. 남준의 눈에서 눈물이 천천히 볼을 타고 흘러 바닥으로 뚝 떨어졌다. 눈물짓고 웃는 지민을 보며 같은 얼굴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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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빛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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